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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제이 Mar 23. 2019

100가지 꿈에 도전한
가슴 뛰는 청년의 이야기

에피소드 23. 내가 호주에서 눈물을 흘렸던 유일한 순간

나는 호주에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유일하게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빚을 지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병원 수술대의 피를 닦았고, 설거지, 화장실 변기통을 닦고, 공사판에서 시멘트를 옮기는 등 하루에 16시간이 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새벽부터 일하고 저녁에 도착하면 차에서 빵 먹으며 30분 누워있다가 다시 저녁에 일하러 갔을 때도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교통사고 났을 때도, 쨈 없이 식빵만 먹으며 배고픔을 느꼈을 때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일상에 안주하려고 했을 때는 정말이지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상처도 받고 힘들어하고 게으른 것으로 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빈둥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멘틀은 쿠크다스 과자처럼 쉽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도 늘 도전을 이야기해왔지만 학창 시절의 지질했던, 평균 이하의 삶을 살았던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릴 적 순수한 꿈인 모험가가 되고 싶었으나 현실에 적응하여 이제 이만하면 충분히 했다고, 취미로 해도 되겠지 하며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가슴 뛰는 꿈을 접으려고 할 때, 나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너무 괴로웠고 힘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내가 조금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괜찮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눈물을 흘렸을 때는 언제였을까?


그건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생각했을 때였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우리 예쁜 동생까지.

사범대학 졸업에 장교 출신에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데 돈은 돈대로 다 쓰고, 매일 다치고 부러지고, 저에게 그 정도 하면 되지 않았냐고 늘 말씀하셨다.

나는 제 꿈을 향해 나만 생각하며 나아가지만 그 아들을 보며 하루하루 걱정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우리 어머니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늘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께서 제 고비사막 마라톤에서 250KM 사막을 달리면서 기절하고 진통제 먹고 발톱 빠지면서 완주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 아들의 가슴 뛰는 꿈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훗날 여동생이 나중에 말해줬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엄청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때 저에게 사랑하는 우리 아들, 모험가 최지훈 늘 응원하고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셨다. 그렇게 처음으로 인정받고 호주로 떠났는데 2년간 돈은 다 잃고 나이 30살에 청소, 설거지하고 있으니 부모님께 죄송했다.


그전에는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아무렇지 않게 먹었는데 2년간 혼자 장을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아침 점심 저녁 3끼를 하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귀찮아 사 먹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본인 밥은 그냥 고추장에 나물에 비벼 드시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는 항상 진수성찬 7첩 밥상을 해주셨다. 늘 아버지, 아들, 딸 먹고 싶은 것을 물어보셨고 매일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오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 절대 못할 텐데, 새삼 어머니의 사랑이 떠올랐다. 본인은 대충 먹어도 자식만큼은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고 본인은 못한 것이 많아도 자식만큼은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에 아낌없이 투자해주셨다.

철없는 나는 30살이 돼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1%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마 부모님의 사랑은 평생에도 내가 못 갚은 것이고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2019년도에는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호주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12월 12일 내 생일 때 일이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소시지 공장에서 일을 했고 저녁에 청소를 하러 갔을 때다. 

그날 저녁에는 회사 오피스 청소를 했는데 직원들 개인 휴지통을 비우는 일이었다. 

어느 날과 똑같이 휴지통을 비우고 있었고 호주 직원들은 웬만하면 5시 전에 칼퇴근하기 때문에 퇴근하기 때문에 밤 7시면 남아 있는 직원이 거의 없다.


돈이 부족했던 그 당시 나는 하루하루 빵을 먹으며 지냈는데 사무실 청소를 하다가 직원이 먹다 남은 빵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수많은 고민을 했다. 그건 먹을까 말까 하는 고민이 아니었다. 먹는 건 당연했고 언제 먹어야 하나 타이밍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먹다 남은 머핀이 있는 방을 일부로 계속 돌다가 야근한 직원들이 나갔을 때 얼른 책상에 있던 머핀을 주워서 한입에 넣었다. 행여나 누가 볼까 봐 눈치 보면서 물도 없어 목이 막히는데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삼켰다. 그리곤 저녁 한 끼 해결했다고 좋아했다. 그렇게 집 가서 씻지도 않고 피곤해서 침대에 누웠는데 그때 가족 단독 방에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그 영상에는 어머니 아버지 동생이 아들 생일 축하한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영상 찍는 것을 어색해하지만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노래가 끝난 후에는 항상 건강하고 잘 지내라고 사랑한다고 하셨다.


불도 꺼져있는 어두운 방에서 그 영상을 본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나는 부모님께 늘 걱정만 끼쳐드렸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도전하다가 이리저리 다치고 고생하고, 그러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모험가로 인정받고 호주로 떠났을 때, 훌륭한 사람이 돼서 돌아가겠다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돼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 가진 것 하나 없고 누가 먹다 남은 머핀을 몰래 먹고 목 막혀 가슴을 치며 삼켰는데도 한 끼 해결했다고 좋아하는 나 자신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돈 못 벌어도 되니까 잘못해도 되니까 몸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빰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남의 아들들은 다 어디에 다닌다, 저기 다닌다 하면서 떳떳한 직장을 다 가지고 있고 아들이 용돈 주고 명품 선물해줬다고 자랑하는데. 저는 아직 직업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고, 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들이 이렇게 멋지다며 남들한테 자랑할 수 있는 떳떳한 아들이 되고 싶었는데 매일 걱정만 끼쳐드려서 그게 늘 죄송했다.

그리고 어머니께 힘들게 꿈을 인정받고 호주로 갔는데 200만 원짜리 중고차 타면서 2년간 설거지하고, 변기통 닦고 시멘트 나르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선한 영량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아직까지도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드리고 있어서, 호주에서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이 우리 가족이었는데 또 힘든 것을 가장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또 우리 가족이었다.

이렇게 내가 호주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흘렸던 순간은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했을 때였다.

어떤 힘든 일이 찾아와도 눈물이 나진 않았는데 이렇게 눈물을 펑펑 흘렸던 그날을 생각하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가족이 늘 옆에 있었으니 익숙함에 속아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었던 것 같다. 나의 가족이 곧 나의 행복이었고 내 인생에서 행복의 중심은 우리 가족이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우선 내가 행복해야 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의 시작이었다.


나의 가족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도전에 반대하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내 꿈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도전, 꿈보다 소중한 건 나의 가족이며 행복의 본질은 가족에 있다는 것 알았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는 가족만큼 소중한 것은 없고, 미래의 배우자 나의 아이들, 그리고 가족 같은 지인들이 나에게 1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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