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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제이 Apr 18. 2019

하늘에서 입원하다.

현재 나의 근황 19.4.18

[내 나이 31살, 하늘에서 떨어진 나를 돌아보며 그리고 미친청춘을 보냈던 나의 20대를 돌아보며]


2월 16일, 나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내려오는 도전을 계획하며 나는 

어느 때와 똑같이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메고 산 정상으로 향했다.

오전에 들뜬 마음으로 산 정상에 올랐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로 덮여있었다.

결국 한 시간 기다리다가 다른 산으로 이동했고 늦은 오후에 돼서야 비행할 수 있었다.  

오전에 비행을 못해서 그런가, 기다림은 나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비행을 했을 때는 말로 표현 못할 기쁨에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2회 비행을 하고 해가 질 무렵, 나는 여기서 그만두고 내려갔어야 했다.

그러나 한번 더 비행하자는 말에 신나서 다시 올라갔다. 어릴 적부터 나는 무언가 배움에 미친 열정을 가지고 있기에  차량이 아닌  걸어서 올라가라 해도 나는 올라갔을 것이다. 

그렇게 산 정상에 올라 내 얼굴에 스치는 자연의 바람을 느끼며 서있었다. 

보통 영화에는 큰일이 나기 전에 뭔가 느낌이 싸하거나 복선이라도 암시해주지만

나는 오직 비행에 온 집중 해서인지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렇게 마지막 비행을 시작했다.

 

나는 또 한 번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착륙장 상공을 돌기 시작했고,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장님께서는 20년 넘게 200명이 넘는 교육생을 가르쳤지만 역대급으로 제일 잘 타고 감각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일까 나는 비행 중에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나한테 재능이 있네, 해볼 만하네,  조금 더 과감히 해볼까" 

이 생각은 저승길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이 생각이 드는 순간이 복선임을 병원 침대에 누워서야 깨달았다.


내가 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면적으로 물에 대한 트라우마,고소공포증, 대인기피증이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교만'이었다.

겸손하지 못한 탓에  정말 수도 없이 고생했다. 억이 넘는 전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남들은 

한번 경험하기 힘든 생사의 갈림길에 나는 여러 번 놓인 적도 있었다.

그래서 '교만'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고 계속 그러지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사람의 본성인지 나의 본성인지  조금만 잘나면 내 가슴 한 구석에서 '자만'이라는 것이 슬슬 스며올라온다.

 

아이고, 나는 진짜 아직도 한~참 멀었다. 어릴적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가정에 충실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스스로 내 그릇이 작게 느껴진다.

나도 많은 사람과 많은 것들을 포용해줄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고 그것이 너무나 간절했지만

굉장히 어렵다. 분명 그릇 넓힌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닌데 도대체 얼마나 더욱 노력해야 하는 건가?  


나는 스스로를 대한민국에서 20대를 가장 열심히 보낸 청년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초년생 때 힘든 시기와 겹쳐 눈물을 흘리며 훗날 세상을 가슴 뛰게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그만큼 치열한 20대를 보내기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내 가슴 뛰는 꿈을 위한 도전은 과연 잘했을까? 

일반적으로  보기엔 다양한 도전을 했다. 수상인명구조원을 양성하는 수영강사, 스키강사, 육군장교로 군복무했고, 철인 3종 풀코스 아이언맨 대회 20대 1위, 프리다이빙 대회에 참가해서 장비 없이 바다 수심 45M를 내려갔다. 365일 세계일주를 했고,  크라우드펀딩으로 네팔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네팔고아원 아이들에게 250만 원 치 생필품을 지원하기도 했고, 3개월간 16kg 감량 이후  호주에서 열리는 세계 국제 보디빌딩 대회에 참가도 했다. 4개 발톱이 빠지고 환각에 쓰러지면서 까지 250KM 사막을 7일간 뛰었고 마지막 코스는 세계 선수 107명 중 19등으로 완주했다. 그리고 수십 가지 넘는 자격증과 레포츠에 도전했고 결국 100가지 넘는 꿈 리스트를 모두 이룰 수 있었다.   


한 번도 SNS에 이렇게 나에 대해 적은 적이 없었다. 아마도 주변에 나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않느 성격과 거만과 만용을 가진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적는 건 나 잘났다고, 이 정도 했던 청년이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고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운과 시기가 따라줘야 한다는 것,

기회와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못하면 나처럼 이렇게 고생 할 수도있다는 것을 사회초년생들에게 말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나의  꿈의 방향을 제대로 못잡고 패러글라이딩에 집중을 하다가 결국 응급실로 실려갔다. 결국에는 본인의 핵심을 가지고 있지않고 중심이 흔들린다면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느 것이다.


많은 분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도전들을 할 수 있었을까 이다.


TV에 나오는 사람들 보면 어떻게 기업 후원도 잘 받고 금전적으로도 여유 있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나는 단순 무식해서인지 10년간 그냥 막노동하며 돈을 벌고  돈을 모으면  꿈에 도전하고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식당 설거지, 환풍기 수리, 고기잡이 배, 농장, 건설현장, 병원 수술대 피를 닦고 오피스 화장실 변기통을 닦는 등 15가지 넘는 일들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의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저 내가 늘 웃고 다니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이니 인상좋고 선한 청년으로만 보고있지 나의 보이지 않은 이면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고생했고 노력했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저 청년은 그냥 잘 살아서 저렇게 하고싶은 것을 다한다고 말하기도하고  나쁜 뜻으로서의  YOLO족이라고 부른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고 아무 대책 없이 사는 청년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그냥 평범하게 안정적으로 살고싶다.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이 남들이 가지않은 길이며 그러니 미래가 보이지않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이렇듯 나는 스스로를 대한민국 도전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20대를 대표하는 실패의 아이콘이라는 말이  더 가깝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넘어뜨리고 다치고 힘들어서 눈물 흘리고, 미칠 것 같이 힘든 순간들을 계속 넘어왔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이번 고비만 지나면 다시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지만 또 다른 고비들이 더 크게 찾아온다. 

그렇다고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나는 지인들에게 폐 끼치거나 도움받는 것을 정말 안 좋아한다.

그러나 바보같이 도움 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아낌없이 다 퍼주며 남들을 도와왔고 어리석게도 나도 중심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늘 희생하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그만큼 많이 당하고 또 당하고, 지금은 알면서도 바보같이 거절 못하고 나누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그냥 이렇게 남 도우면서 살 팔자인가 보다 싶다. 


한국에 오기 전 나는 여러 번의 프로젝트 실패와 교통사고를 겪으며 1년을 보내고,  한순간 탐욕으로 1억 4천이 넘는 전재산을 잃으며 1년을 보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무일푼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 청춘 도다리 윤효식 대표님의 사랑으로 청춘들을 위한 동기부여 강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셨는지 큰 반응과 함께 강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10년 만에 드디어 나만의 꽃봉오리가 피려나 싶었지만 그것도 딱 2개월도 되지 않아 

나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제 좀 되네, 해볼 만하네, 내가 잘하네 하는 순간 시멘트도 다져진 둑에 처박았다. 


바람을 잘못 맞아떨어지는 순간 200% 확실이 들었던 무서운 생각은, 내가 그동안 수없이 다치고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이번엔 진짜 끝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때보다 인생의 파노라마가 짙게  스쳤고 제발 전신마비라도 괜찮으니 숨만 붙어있게 해달라고 그 순간 기도를 했다. 


상체에 부딪쳤으면 즉사했고 허리 하반신이라면 불구가 됐을 거라고 했다. 김병만이 스카이 다이빙하다가 떨어진 충격과 같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타고난 반사신경과 유격 교관 자격증을 따면서 배웠던 스킬로 허벅다리를 올려 두 발바닥으로 착지했고 나는 소리도 못 지르고 바로 쓰러졌다. 하필 내 얼굴 바로 앞에 썩은 새끼 고라니 시체와 날파리들이 뒤엉켜있었는데 그게 대수랴. 나는 너무 아파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고 숨도 못 쉬었다.  두 다리에 감각은 없었고 나는 하반신 마비는 일단 기본이라는 생각과 내 삶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다.   

둑에 부딪친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앞에 가게의 아주머니가 교통사고 난 줄 알고 급히 나왔다.


그리고 이를 멀리서 본 동료들이 급하게 뛰어와 나를 업혀서 인근 병원으로 바로 실려갔고 

엑스레이를 찍으니 의사 선생님께서 현역 운동선수냐고 물어보셨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다칠 수 있고, 이러한 충격에 이 정도로 끝난것이 진짜 기적이라고 하셨다. 이런 경우에는 패러글라이딩 강사분들이 말씀하셨던 것 처럼 살아남기 힘들뿐 더러 최소 하반신 마비였다고 말한 것과 일치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내 머리를 울렸다.

이전에도 사실 걷기 불편했을 텐데 운동을 꾸준히 해서 불편함을 못 느낀 것 같다고,

왼쪽 발목에 뼛조각이 심하고  양발 뒤꿈치에 금이 심하게 갔는데 앞으로 뛰는 건 힘들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자칭 모험가로 주로 몸으로 하는 도전을 하는 사람인데 앞으로 뛰는 건 힘들다고 하는 건 나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이내 나는 시무룩해졌고 어이없을 수도 있지만 나의 특유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그날 저녁 치킨을 시켰고 반마리는 내가 먹고 반마리는 옆에 병실 입원 분들에게 휠체어 타며 치킨을 나누어주었다. 하긴 이도 그럴 것이 예전에 주식으로 한 시간에 7천만 원 잃었을 때도 다음날 바비큐 파티할 것들을 구상하고 장을 봤으니 멍청한 건지 또라이인지 낙천적인 건지 참 모르겠다. 

일단은 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병원에서 기억 남는 건 처음에 대 소변을 받는 것이 정말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평소에 도움 안 받는 성격인데 소변, 대변을 누군가에게 건네준다는 것은 정말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시간이 지나니 하늘을 날아다가 떨어진 것이 다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들었다.

그동안 10년간 정신없이 보내다보니 이제는 한템포 쉬라는 하늘의 계시같았다.

그렇게 나는 생전처음 2개월간 아무것도 하지않은채 침대에 빈둥거리며 쉬고있다.

다들 그렇게 도전하던 사람이 침대에 계속 누워서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는데 사실 나는 지금도 굉장히 좋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동적인 사람이 아닌 정적인 사람이였고 음악과 책 읽은 것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렇게 도전하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로 삶을 변화한 사회초년생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나도 도전을 멈추지않는 것이다.


그렇게 사고가 난 2월 16일, 지금은 4월 18일이고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고 목발은 내 옆에 눕혀있고  나는 이렇게 휴대폰으로 노다가 하듯이 자판을 부지런히 치고 있다.  

다행히 목발로 걷기 시작하고 머지않아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리면 다들 걱정하실까 봐 일부로 말을 안 하고 있었지만 이제 다 나을 때가 되니 이렇게 SNS에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차비도 없고, 그렇다고 얻어먹는 것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내 현재 사정과 배경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내 침대 옆에 첫째 서랍에 현찰 4만 원과 그 위에 분홍색 돼지저금통에 찰랑거리는 동전들이 내 전재산이다. 

그렇다면 다들 궁금해하는 사실 한 가지, 모험가 최지훈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사범대 체육교육과를 나왔고 수영강사, 스키강사, 장교로 병사들을 챙기고, 중학교 체육 교생 실습도 다녀오고, 사람 돕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사람 만다는 것을 좋아하고 애견, 아이들 또한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꿈은  동기부여 강연가로서 활동하고 기업, 군부대 강연 및 학교기관에서 진로 관련 교육자로 지내고 싶다. 


결국에는 내가 22살부터 생각해왔던 세상을 가슴 뛰게 하는 사람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파란만장했고 치열했던 20대의 경험을 토대로 학생 및 사회초년생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 

나의 주변에는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분들과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앞날이 두렵지 않다.  이 글을 읽고 나의 진심을 알아주시는 분들 또한 나에게 좋은 강연자리를 추천해줄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머지않아 나는 도전의 아이콘, 실패의 아이콘 답게 다시 일어날 것이고 훗날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함께 꿈을 꾸면 더욱 빛나고 멀리 오래간다.

 

아! 그리고 때마침 5월1일과 2일에 부산대학 강연을 시작으로  5월달에 8번의 강연 요청이 왔다.

그리고 나의 원고를 본 출판사들에게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고 몇 개월 되지 않아 책 출간도 될 것 같다. 첫 작가로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출판사도 나타났고 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릴 수 있게 올인하고 싶다는 출판사도 나왔다. 지금은 신중해 생각하고있고 나는 그냥 대형이든 소형이든 열정 있는 가족 같은 출판사를 만나고 싶다.  


책이 출간되면 나의 다사다난했던 뜨거운 청춘 이야기가  많은 사회초년생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을 들고 보육원, 학교 밖 아이 들을 위한 봉사 및 멘토링을 하고 싶고 내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나눔을 그 이상으로 베풀고 싶다. 


내 나이 31살, 지금까지도 최악의 상황에 앞으로 더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도전의 아이콘 답게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사명을 가지고 끝까지 도전가, 모험가로서의 삶, 가슴 뛰는 삶을 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 하고 가슴 벅찬 그 꿈은, 포지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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