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워 잊기 힘든 20에게
20에게.
20과의 헤어짐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20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마치 짝사랑을 떠나보낸 어린 소년의 독백 같네요. 문장을 몇 번 고쳐보려고 했는데 글자를 쓰고 나니 남은 편지지가 없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나와의 약속입니다. 그것이 더 우리네 인생과 같지 않겠습니까. 과거를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지워버리고야 말겠습니다.
여하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20이 떠올랐습니다. 손수건에서도, 큰 우산에서도, 가지런히 모아 둔 맥주병에서도 20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습니다. 모든 곳에 기억이 묻어 있었어요.
아무래도 나는 마지막이 꽤나 아쉬웠나 봅니다. 20도 아시다시피 나는 어떤 관계의 끝자락에서 오랫동안 헤매고 맙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모습이지요. 가끔은 끝을 마주하는 슬픔이 싫어 사람에게 정과 곁을 주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여하튼 20을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꽤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리를 했습니다. 아시나요? 나는 꽤 요리를 잘하는 편입니다. 너무 놀란 얼굴을 하지는 말아 주세요. 칼질을 하고 끓이고 굽다 보면 스트레스가 사라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요. 올리브 오일에 마늘을 썰어 넣었습니다. 파스타 면을 삶았어요. 손목에 스냅을 줘서 요리사들처럼 멋지게 마늘과 면을 섞고 싶었지만 나는 내 주제를 알고 있습니다. 소심하게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팬에는 연어를 구웠어요. 맛있는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릇에 올리고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괜히 입술이 튀어나왔습니다. 요리를 하는 시간 내내 20의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단 말입니다. 아주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숨을 쉬고 난 후에 게 눈 감추듯 밥을 빠르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맥주 한 캔을 뜯고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노려보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아주 큰 미련에 불과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을 잡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운명이라고 해석해 주세요.
나는 20 앞에서 내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해도 되는 것이 퍽 좋습니다. 고백하지만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의 재미있는 얘기를 외워두고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말하는 것뿐이에요. 심지어 나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하는 방법마저도 계산하고 움직이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않아요.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한다니요? 내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단 한 명도 믿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20 앞에서 터무니없이 웃기고, 계획 하나 없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순간도 나 스스로인 적이 없었어요. 그것이 나는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연기한 것은 아니에요. 내 다른 면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순간이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20이 나를 내 본질과 가장 먼 사람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20을 기억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억을 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지요. 나는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은 사람입니다. 20을 무엇으로 기억하면 좋을까요? 아마도 빛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은 그간 나의 빛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쓰니 어째 다시 고백하는 연서 같아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상상하라고 놔두고 싶지만 굳이 짓궂게 해설하겠습니다. 많은 색의 빛을 겹쳐보면 흰 빛이 되는 것을 아시나요? 20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멀리서 보면 단순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옆에서 지켜보면 아주 다채로운 색이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20을 관찰하는 것은 나의 아주 흥미로운 일과였습니다. 이제 나는 과제를 마쳤습니다. 다만 20은 다른 사람에게 계속 본인을 나누어주세요. 연이 닿는 곳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