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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3. 2023

서신 17. 어린아이처럼 내게 억지를 부려 주세요

그동안 재미있었다는 17에게

17에게.

 

그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줄이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늘여 쓰자면 아팠고, 후회했고, 포기했다는 것에 관한 일입니다. 세 단어 사이에 있는 짧은 띄어쓰기에 많은 이야기를 넣어야 하겠지만 구태여 채워 넣기에는 비참하여 이만 줄이는 바입니다.

 

나는 단어와 단어 사이 띄어 쓰는 공간이 그렇게 광활할 줄 몰랐습니다. 특히 '후회했고'와 '포기했다'의 사이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길을 잃은 기분으로 며칠 밤낮을 서럽게 지냈습니다. 후에라도 원하신다면 아주 싫은 표정으로 고백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는 내게만 처절한 것이라 아마 하루 지나면 17은 잊을 것입니다. 원체 그렇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공감할 수 있는 유효기간은 채 하루가 되지 않습니다.



 

어제는 이름 모를 개와 함께 맥주를 마셨습니다. 충분히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바로 앞에는 물이 흐릅니다. 전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불량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우기 딱 좋은 음습한 곳입니다. 다만 그만큼 사람이 없어 가끔 맥주 한 병을 마시며 물가에 앉아 시간을 죽입니다. 어제도 그랬는데요. 평소와 다른 점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굳이 내 근처에서 낮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곁에 있지만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 딱 좋은 말동무였습니다.

 

머릿속에만 나열되던 문장들을 입으로 발음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제일 처음으로 한 것 같은데요. 막상 그 말이 귓바퀴에 앉으니 그 감정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보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평생 볼 수 없을텐데, 라는 가정을 합니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아련하고 서럽고 슬프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개에게 말하고 나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몇몇 번호를 지웠습니다. 17의 번호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연락이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버렸습니다. 선택권이 없으니 오히려 자유로워졌습니다. 개는 떠났습니다.



 

17이 알진 모르겠습니다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술 몇 모금과 함께 편지나 쓰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한 달에 하루 모자라게 남았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게 남았습니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고백하자면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늘 바삐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지만 또 나름 행복한 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많은 것을 굳이 머릿속에 욱여넣고 계산하는 것은 나의 아주 못된 버릇입니다. 그런 것은 돈을 버는 것에는 꽤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마음을 버는 것에는 소질이 없는 일입니다. 인생은 언젠가부터 체스판이었습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장기판일까요. 나는 상대의 수를 생각하고 내 반응을 준비하며 피곤하게 삽니다.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능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는 것이 지겨워졌습니다.



 

혹시 어린아이와 체스를 두어 보셨는지요? 나는 어린아이와 체스를 두어본 적은 없지만 딱 어린아이처럼 체스를 두는 사람과 마주한 적은 있습니다. 상대방 진영 끝에 다다르지도 않은 폰을 퀸으로 프로모션 하며 이것은 정의의 쿠데타라고 웃던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우김에 당연히 패배했습니다만 나는 그 경기를 사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끔 그 사람과 체스를 뒀습니다. 룩이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거나 나이트가 두 번 널뛰는 그런 우김이 있었습니다. 짐짓 화를 내긴 했지만 나는 좋았습니다. 나는 내게 막 떼를 쓰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17과 체스를 둔 적은 없지만 17은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간 나의 억지를 받아주어 고맙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내가 17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입니다. 또 모르지요. 어떤 변덕에 따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새초롬하게 다시 쓸 미래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끝이 두려운 나는 늘 이렇게 상상할 여지를 남깁니다.

 

아니면 17이 내게 편지를 써 주십시오. 메시지로 '잘 지내?'의 짧은 어구라도 좋겠습니다. 부디 체스판 위에 백색 퀸 둘을 올려두고 비숍으로 한 번에 내 폰 두 마리를 잡으세요. 사실 그런 기적은 없겠지요. 17은 끝맺음을 맺는 것에 있어 마치 마에스트로 같은 사람이니까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은 아주 멍청한 일입니다. 허나 꽤 오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내게 떼를 쓰는 기적을 보내 주십시오. 이런.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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