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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20. 2023

서신 15. 별이 밤을 부릅니다

아픈 기억 속에 남은 15에게

15에게.

 

15도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해안가를 달려 호텔에 도착했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문장이겠지만 새삼 대견하다고 여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처럼 배낭 하나를 매고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 타 가장 값싼 민박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늘 스스로를 덜 큰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럴 때면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해집니다. 차를 탄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사실 완벽한 자율 주행이 나올 때까지 면허를 따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 면허를 따고 말았는데요. 중고차 한 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왜 15가 운전면허는 꼭 있어야 한다고 우겼는지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제주는 내게 꽤 많은 아픔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큰 아픔이 있을 때마다 제주에 가야 할 일이 있었어요.

 

바다에서 잠자고 있는 현무암들을 자세히 본 적이 있으신가요? 수없이 많은 송송 뚫린 구멍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만약 15가 운이 좋으시다면 그 구멍들 중 몇 개 속에서 끝없이 아팠던 내 추억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도치 않았던 우연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제주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슬픈 이야기들을 제주 구석구석에 쏟아내고 돌아옵니다. 난지도를 들어 보셨나요? 예전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였던 곳입니다. 나에게는 제주도가 내 감정의 매립지였습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난 후에 마음을 정리하러 제주에 내려간 적이 있어요. 혼자 맥주 한잔 하면서 올레길을 걸을 생각이었습니다. 올레길에 가려고 지도를 찾던 중에 유명한 해장국집 이름을 마주했는데요. 그 이름을 보며 그전 연인에 대한 상처가 생각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전 연인에 대한 아픔 때문에도 제주를 찾았었거든요. 우습게도 나는 일주일 전에 헤어진 연인이 아니라 몇 년 전 연인에 대한 추억을 다시 상기하며 맘껏 아파했습니다. 미뤄둔 아픈 기억들에 익사할 뻔했습니다.



 

이 섬이 아픔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15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아시겠지요. 나는 제주에 올 때마다 15를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게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했어요. 왜 이 아름다운 곳을 아픔으로 기억하게 하냐는 말입니다.

 

하여튼 15의 악취미는 알아줘야 하겠습니다.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15를 목도하는 것은 꽤나 재미없는 일이란 말입니다. 분명 언젠가 잡초 정리하는 법을 배워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그러하지 못한 것은 조금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게도 나름 바쁜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15를 보러 가지 않았지요. 조금은 샘이 나십니까? 나는 낮에 죽은 듯이 잠을 자고 별을 바라보러 어떤 바닷가에 앉았습니다.



 

생각보다 별은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바닷바람은 늘 매섭습니다. 그래도 별을 바라보면서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청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러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내 개똥철학을 하나 들어주세요. 내 삶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 중에 가장 아끼는 것입니다.

 

별이 밤을 부릅니다. 밤이 별을 부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말은, 밤이 되었기 때문에 별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별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밤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슬픔은 별이고 행복은 밤입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슬픔이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충분해 슬퍼할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행복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슬픔이 별이고 행복이 밤이냐고 물으신다면 아주 고집 어린 얼굴로 대답하겠습니다. 슬픔은 하필 별 같은 것이라 눈길이 가는 것이고, 행복은 하필 밤 같은 것이라 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고 많은 것입니다.

 



아주 진지하게 적었습니다만 폭소하셔도 좋습니다. 원래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은 초기에는 웃음거리로 전락하기 마련인걸요. 나는 완벽히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행복이 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슬픈 제주를 떠나는 비행기를 탈 때는 조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15를 떠올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충분히 슬퍼했고, 비행기에서는 살짝 졸며 좋은 것을 추억할 수 있었어요.

 

아직도 개똥철학이라고 무시하신다면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그 생각은 15를 보며 했던 것이에요. 내가 아기오리마냥 15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 않습니까? 15로 충분히 슬퍼했기 때문에 나는 15로 행복합니다. 그런 모든 일련의 과정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심심하시거든 그런 생각을 해보세요. 누워서, 별을 바라보십시오. 할 일이 없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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