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걸음으로 같은 길을 가는 16에게
16에게.
식사는 하셨나요? 저는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은 배달이 안된다는 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최소주문금액을 맞추려면 탕수육과 함께 세트로 시켜야만 합니다. 아니면 팔자에도 없는 삼선짜장 곱빼기에 콜라라도 주문해야 해요. 덕분에 유니짜장이니 사천짜장이니 하는 고급 짜장면에 대한 지식만 늘어갑니다.
혼자 먹는 음식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짜장면은 혼자 먹고 싶은 음식입니다. 사람마다 짜장면 먹는 방법이 다르지요.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사람도 있고 긴 면을 자르지 않고 먹는 사람도 있어요. 3은 어떻게 드시는 편인가요? 나는 평범하게 먹습니다만 단지 아주 빠르게 먹습니다. 입안 가득 면을 넣었을 때 숨이 살짝 막히는 그 기분이 좋아요.
짜장면의 맛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목 막힘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먹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려운 일이에요.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교양도 없이 그렇게 입안에 욱여넣는 것은 조금 부끄럽습니다. 밥상머리 교육 못 받았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할 것만 같아요. 그래서 내게 짜장면은 보통 혼자 먹는 음식입니다.
짜장면은 졸업과 관련된 음식이었지요.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 때 빠짐없이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여서 숨 막히게 먹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런대로 기쁜 느낌으로 식사를 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함께 먹는 식사는 혼자 하는 것보다 소중하니까요.
그래서인지 16의 생각이 났습니다. 긴 시간을 마치고 결국 졸업을 했으니까요. 아주 어려웠음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장하다는 말을 건네겠습니다. 건네주신 논문은 사실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여간 두꺼운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성서를 대하는 기분으로 몇 페이지를 넘겼는데 진도를 많이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16이 어떠한 기분으로 이 논문을 썼는지 감히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니, 이제는 16 박사라고 불러야 하겠네요.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좀처럼 변하지 못하고 그대로인 사람이니 여전히 16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농담이 있잖아요? 나는 아마 영생해 버리고 말 모양입니다.
미생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에요. 말도 통하지 않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것들과 상상 속에서 대화해야 합니다. 실험 결과 앞에서 나는 몇 번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내 신앙심이 가장 높았던 시절이 바로 석사과정 때였던 것 같아요.
아무도 없는 주말에 혼자 실험을 하고 있으면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미생물에 감정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한 달을 보낸 것 같아요. 우리는 온도나 산소 농도 정도만 대충 맞춰서 미생물을 키우잖아요. 만약 그들이 감정이 있다면 매일 아침 인사를 해주거나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면 더 잘 크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 내게 살갑게 대해주는 것을 바랐을 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삶을 살다보면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울적합니다. 쓸데없이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끔 그런 상상들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6에게 몇 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나는 연구가 꽤 외로웠어요. 아마도 스스로를 몰아세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2년 내에 논문을 내지 못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거든요. 모든 것에 속하는 것은 많습니다. 꿈, 진로, 사랑, 뭐 그런 것들.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서 시간을 버텨내는 것은 꽤 외로웠습니다만 그래도 논문을 쓰고 나니 모든 것은 추억으로 바뀌었습니다. 16은 언제 행복을 느끼시나요? 나는 행복도 불행도 깊게 느끼지 않는 둔감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자면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가장 행복한 순간을 뽑으라면 내 논문의 첫 장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것이 그리워 나는 다시 대학원에 가려고 해요. 웃기지 않나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인류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궁금한 것을 풀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그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이 가장 사랑스러웠어요.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약의 종류는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쾌락을 느끼는 것만이 유일한 것입니다.
16은 좋은 연구자일 겁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보증할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다소 불안하더라도 원하는 길을 찾아 걷기를 바랍니다. 16의 편지에 언젠가 다시 만나 연구하자는 말이 있었어요. 나는 좋은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어떠한 순수성을 헤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의 연료를 가끔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사용하고는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강력한 동기가 되고는 해요. 불순물이 많아 오래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나는 자주 사용하는 편이에요. 16은 나를 열등감과 패배감 따위와는 먼 인간으로 기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그것도 맞습니다. 내가 비교하는 것은 나 자신이에요.
학교를 다닐 때 담임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살을 쏠 때 방향이 1센티미터만 틀어지더라도 과녁에서는 1미터 차이가 날 수 있다고요. 선생님께서는 처음 시작할 때 계획을 잘 세우고 미래를 바라보라는 뜻으로 설교하신 것 같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선택을 조금만 잘못해도 나는 저 아래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다고요.
그래서 나와 싸우는 것은, 과거에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했을 또 다른 나입니다. 실체 하지도 않는 스스로와 싸우는 것은 여간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것을 이겨낼 때면 어떠한 성취감이 저 발끝에서부터 올라옵니다. 이런 삶을 사랑하는 나는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부정적인 것이 좋습니다. 부정적인 스스로를 꽤 멋지다고 생각하거든요. 긍정적인 것만 긍정적인 세상은 다소 지루하지 않겠냐며 우기고 있습니다.
16은 나와 달리 좋고 순수한 것을 삶의 연료로 써 주세요. 사람의 마음은 한 길을 알 수 없는 것이라 16의 깊은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 다만 옆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16은 대단한 사람이니 부디 긍정적인 것으로 나아가세요. 나는 그것이 분명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