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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Aug 02. 2023

서신 13. 중요한 말 세 가지를 하지 못합니다

끝내 사랑하는 13에게

13에게.


어젯밤은 잘 주무셨나요?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불면증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큰 고민이 있어도 잠은 제시간에 푹 잘 수 있는 편리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불면증이 있어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열린 창 밖으로 앰뷸런스 소리가 크게 들려 새벽에 잠을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새벽 세시는 얄궂은 시간이에요. 데면데면했던 사람과도 사랑을 속삭일 수 있고, 희망이 없는 사람과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마법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드디어 13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가장 마지막에 하는 버릇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최초에 했던 직관과 동일하다는 습관도 아직 있습니다.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첫 느낌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처음에 느낀 그대로 결국 행동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편지를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꺼내 놓습니다. 또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후회를 참 많이 하며 글을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13에게 배웠습니다.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어보면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삶을 배웠다고 하겠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떠오르는 것은 버텨내는 것일까요. 13은 모든 것을 굳건히 버텨냈습니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런 것이라 나도 그러려고 노력했습니다.


삶은 무언가를 버텨 내는 것의 일련이었습니다. 시련이 참 많았습니다만 꼭 어려운 것만 버텨 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행복한 것도 어찌 보면 버텨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땅에 디디고 똑바로 서 있지 못하면 결국 행복도 맘껏 즐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13을 보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서도 가장 그 시선을 신경 쓰고는 합니다. 나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은 꽤 재밌는 일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 성적표처럼 말이에요. 나는 성적표에 적혀 있는 '수우미양가'나 내신 등급은 쓱 지나쳤지만 마지막에 있는 줄글로 된 평가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습니다.


종합해 보면 나는 굉장히 입체적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타인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은 더 잘 알게 되는데요. 최근에 받은 두 편지에는 '너는 붙임성도 좋고 밝아서 시간을 보내면 재밌다'는 말과 '너의 천성적인 어두움이 역설적으로 내게 힘을 준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더없이 상반되는 말에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로 살면 지루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자신으로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가장 슬픈 일입니다. 나 자신으로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끝없는 권태입니까. 가끔은 밝게, 또 가끔은 어둡게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이 서른이 되었지만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틈새를 헤집고 나아가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입니다만 어째 한 곳에 서있지 못하고 계속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서 있는 순간 나는 죽어버리고 말 것 같습니다. 몸이 죽지 않아도 말이에요.


걸음이 멈추지 않듯 생각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늘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대체 가능한 것이기나 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에서 파도치고 있습니다. 그런 풍랑을 하루 종일 겪어서인지 잠을 잘 때는 꿈도 꾸지 않고 쉴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나는 13을 끝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아 내려 애쓴다면 그 감정이 변해버릴 것만 같습니다. 내 삶의 이상형은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세 가지 단어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의미 없이 자주 반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머뭇거리다가 혼잣말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세 가지 뜻을 잘 알고 아주 적재적소에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세 가지 다 잘하지 못합니다. 노력을 했다고는 하는데 아직 닿지 못했습니다. 웃기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생각을 하는데도 인간사 가장 중요한 말 세 가지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맹이 아니면 대체 어떤 것이 문맹이겠습니까.


13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을 통틀어 13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이 편지를 빌어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다시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13이 행복을 찾아다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대체 행복이 무엇인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하겠습니다만 13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모습을 벤치마킹해야만 나도 언젠가 행복을 찾아 뛰어다닐 수만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걸어 다니거나, 기어서라도요.


요즘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딱히 없습니다. 다행인 것은 불행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는 삶입니다만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행복에 행복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두려울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지금 했습니다. 삶에 마지막에서 나는 그런 결론을 지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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