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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26. 2023

서신 12. 세상의 채도가 낮아졌습니다

사랑을 잃고 울던 12에게

12에게.

 

아직도 고양이를 좋아하시는지요? 나는 예전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신다면 좋아한다는 쪽을 고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12과 함께 고양이를 찾으러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라고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사실 요즘 모든 감정이 그렇습니다. 내 시선을 어떻게 표현해야 12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삼일 정도를 고민하느라 이 편지의 발송이 늦어졌습니다. 그래도 삼일 정도는 기다려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쿠팡 배달도 하루면 온다고 불평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왜 온다던 편지가 오지 않는지 걱정하며 12이 아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채도가 낮아졌습니다. 워드로 타이핑을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씨 색깔을 바꾸려고 창을 열었어요.

 

12도 워드를 자주 쓰신다면 아시겠지만 빨간색이라고 다 같은 빨간색이 아닙니다. 아주 강렬한 빨간색부터 희끄무리한 빨간색까지 줄지어 서 있어요. 다른 색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희끄무리한 색깔들이 지금 내 세상을 칠하고 있습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비슷해요. 예전처럼 감정을 강하게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 때문일까요. 내가 화가 나는 것은 하나입니다. 다시 감정을 원색으로 칠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귀찮은 일이 분명하고 또다시 별난 인간으로 취급받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가장 강렬한 감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무언가를 잃을 때의 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2은 최근 아주 큰 것을 잃지 않았습니까. 고개 젓지 마십시오. 사랑을 잃었잖아요. 사랑인지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12은 적지 않게 괴로워했겠지요.

 

옛날 얘기지만, 어렸을 때 사랑을 잃었을 때는 내가 어떤 영화의 주인공인 것 같았어요. 흘려듣는 노래도 다 내 노래 같다는 말이 이해가 되더라니까요. 그래서 괜히 지하철 역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상상이 안 되시지요? 그때는 감정이 원색으로 읽혔습니다. 매달렸어요. 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가면서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랬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언제부터인가 그랬습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상처는 똑같이 남습니다만 잃은 대상에게 매달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피곤해요. 감정의 원색을 쳐다보는 것이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왜 솔직하지 못하냐고요. 하지만 모든 게 귀찮아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채도가 낮은 감정들은 스쳐 지나가면 엇비슷하게 보이거든요. 주황색이나 빨간색이나 사실 비슷해 보여요. 그래서 헷갈렸겠거니 하면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봅니다.

   


 

그래서 12과의 대화는 재미있었어요. 12은 아직도 감정의 밑바닥까지 꺼내어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다시 내가 세상을 원색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일부러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으며 흐리멍덩하게 보지 않고 말입니다.

 

배에 힘을 주고 소리치며 화를 내고 싶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신경 안 쓸 만큼 슬프게 엉엉 울고 싶어요. 홀려버린 미소를 지으며 미친 듯이 짝사랑하고 싶어요. 12처럼 살아보는 것이 내 소원 중 하나입니다.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혼자 맥주를 마시며 한숨 쉬며 유튜브 보기, 예전 편지들을 찾아 읽어보기, 그리고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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