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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May 05. 2020

공간에는 시간이 묻는다

이사를 하고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새로운 집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어떻게 앉아있어도 불편해 계속 언짢게 몸을 뒤척였다. 공간에는 시간이 묻는다. 내 시간이 하나도 묻지 않은 어색한 공간 속에서 나는 꽤 낯을 가렸다. 그래서 오늘도 괜히 마트에 들려 시간을 죽이고 빙 도는 길을 택해 집에 늦게 도착했다. 바보 같은 일이라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낯선 공간과 친해지는 것을 꽤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이야 참 좋아했지만 새로운 공간을 가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웠다. 첫사랑을 다시 마주하는 기분으로 방에 들어섰다. 어색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부터 주말을 낀 짧은 연휴가 있었지만 밖에는 나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이 공간에 내 시간을 칠해야만 했다.


청소를 하며 괜히 바닥이며 벽을 매만졌다. 못이 박혀있던 자리나 벽지가 헤진 부분을 멍하니 오래 바라봤다. 먼지를 털어내고 물티슈로 바닥을 꼼꼼히 닦아냈다. 전 사람의 시간을 지워내고 내 시간을 묻히려 꽤 애를 썼다. 화장실에 묽은 락스를 뿌려두고 오늘 먹어야 할 것을 생각했다. 아까 고등어를 두 손 샀고 냉장고에 무 반쪽이 남아 있었으니 고등어조림을 하는 것이 옳았다. 무 위에 생선을 올리고 고춧가루며 간장을 올려 끓였다. 기분 좋은 음식 냄새가 방을 뒤덮었다. 홀로 앉아 흰 밥 위에 붉은 고등어를 올려 먹으며 조금 외롭다고 생각했다.


적막함이 싫어 노래를 살짝 틀었고 아는 부분만 조금씩 따라 불렀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노래는 계속됐지만 공허함을 메우기는 힘들었다. 괜히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몇 번 틀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 공간과 친해지려 조금은 노력했다는 사실에 뿌듯했고 불을 끄고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내일은 쓰레기통이나 옷걸이나 요가 매트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내 시간이 잘 깃들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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