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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27. 2020

추석 즈음이 되면 급식에 송편이 오르곤 했다

추석 즈음이 되면 급식에 송편이 오르곤 했다. 집에서 오물거리던 것들과는 다르게 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송편들이었다. 사실 아이들의 관심은 송편의 색깔이 아니라 그것들이 안고 있는 재료였다. 아이들은 보통 꿀이 들어있는 송편을 좋아했다. 급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며 초록색 송편에 꿀이 많다거나 구멍이 뚫려 있으면 콩이 들어있다거나 하는 음모론을 재잘거리고는 했다. 그리고 급식판을 내밀며 초록색 송편을 달라며 눈을 반짝이고는 했다.

하필 오늘 당번이냐며 입을 내밀며 떡을 나누어 주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부탁에 사심을 한껏 이용하고는 했다. 어제 발야구를 할 때 상대팀에서 홈런을 쳤던 아이에게는 초록색이 없다며 강짜를 부리곤 했고 매일 받아쓰기 백 점을 받는 안경 쓴 아이에게는 구멍이 뚫린 송편을 주며 안에 콩이 들어있기를 확신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늘 좋은 냄새가 나 눈이 가는 반장에게는 내심 옆쪽으로 밀어 둔 초록색 송편과 함께 분홍색 송편을 내어주곤 했다. 조폭 마누라라는 짓궂은 별명과 함께 말이다.

사실 나는 유별나게도 콩이 들어간 송편을 좋아했다. 주변  분위기에 맞춰 나도 초록색을 꺼내어 달라며 성을 냈지만 받아낸 초록색 송편이 콩을 안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도나도 송편을 깨물며 자신의 불운에 대해 성토했고 나는 콩이 씹힌 오늘의 행운에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누가 볼 새라 얼른 씹어 넘기고서 역시 송편은 꿀이 들어가야 한다고 아우성 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정말 부끄러워하는 아이였다.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퍽 눈에 띄는 일이었고. 눈에 띄는 것은 영 피곤한 일이었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지면 토마토보다 더 빨개지곤 했다.


어릴 적 버릇은 참 오래도 갔다. 꿈보다 키가 커지고 마음보다 몸이 커진 나이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어째 나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글을 쓰는 것이라거나 차를 마시는 것이라거나 꽃을 보는 것이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고는 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라거나 축구를 보는 것이라거나. 그런 것들도 재밌기야 했지만 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했다. 나는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보다 정확히는, 나답게 살아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 다 산 척하며 늘 취해 있었던 스물 초반에도 여전했다. 아니 여전하지는 않았다. 아마 삼 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비 오는 날 같은 수업을 듣고 있던 당신에게 나는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커서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졸업을 앞둔 그 나이 때의 아이들에게 꽤 현실적이고 잔인한 질문이었고. 나는 그 슬픈 질문을 아무에게나 묻고 대답 대신 한숨을 듣는 것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당신은 달랐다. 나는 쉬는 시간 내내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당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들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다는 기분을 그때 이해했다. 나는 항상 좋아하는 것보다 남들이 많이 하는 것을 선택하고는 했다. 참 편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못하는 일은 상상보다 끔찍한 일이었고. 나는 남들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남들이 선택하는 것을 잘할 수 있었다. 그 수업을 들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그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달랐다.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수업이라 꼭 들어야 한다고 했다. 마침 일차 시험 결과를 나누어 주는 날이었고 나는 일등이라고 적힌 시험지를 멍하니 보다가 구겨 찢어버렸다. 사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 날부터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지도 없이 길을 찾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당신을 동경했다.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은 내게 꽤나 생경한 일이었다. 정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려 했다. 영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당신의 말들을 기억했다.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일이었다. 나와 같은 나이임에도 벌써 당신답게 살아가는 당신을 보며 부러워했고, 나는 나답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우울함을 몇 번 느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좋아하는 일을 찾기야 했지만 그 일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대학원생이라면 늘 달고 사는 후회와 자학을 입에 걸고는 했다. 나는 나를 찾았지만 그것에 당당하진 못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콩 송편 같은 날이었다. 새벽에 찌뿌둥하게 일어나서 버릇처럼 메일을 확인하는데 발신인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불이 짓누르는 따스한 두터움과 어느 정도의 땀냄새.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이 혹시 행복이라는 것은 아닐까 상상했다.

나는 그때 내가 오롯이 나라는 생각을 했다. 논문 맨 앞자리에 써 있는 내 이름을 보고서 마침내 나는 행복해했다. 피곤한 얼굴로 밤을 지새우며 실험을 하는 것이. 엑셀 파일과 논문 몇 장을 들고 토론을 하는 것이. 나온 자그마한 결과를 보고 티 나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구부정한 자세로 논문 몇 자를 쓰며 낑낑대는 것이. 그 모든 것이 나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내 길을 찾아간다는 것의 행복을 드디어 이해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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