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을 가진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붙임성이 좋아 현관문을 여는 누구에게나 달려가 꼬리를 흔들고는 하는 개였다. 내게도 예외 없이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커녕 동물을 대하는 방법도 영 서툴렀기에 우리의 환대에 적극적으로 답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일주일마다 날 격하게 반겨줬다. 멍멍이거나 왈왈이거나 그 중간쯤의 어떤 짖음과 함께. 그 인사를 보며 한 번은 꽤 괘씸한 생각을 했다. 개는 상처 받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짖고 핥고 몸을 부비는 온갖 살가운 반김을 곰살맞게 표현했음에도 영 무미건조하게 머리를 쓰다듬고 방으로 들어가는 내가 밉지는 않았을까. 상처 받는다면 어찌 그렇게 열렬함을 반복할 수 있었을까. 현관문이라는 세계에서 들어오는 이방인을 반기는 것이 본인의 일이라고 여겼던 걸까. 그래서 상처 받더라도 꿋꿋하게 이겨냈던 걸까. 만약 상처 받지 않는다면 어찌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인사가 직업이 되어 버린 텔레마케터처럼 그저 웃음을 입에 걸친 것뿐이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품을 정도로 큰 마음을 가졌던 걸까.
나는 인간의 언어를 하고 우리는 개의 언어를 한다. 인간의 언어를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니 나의 물음은 바람 사이로 흩어져 사라졌다. 개의 언어로 물어보자니 적당한 방법이 없었다. 배를 까보이고 왕왕 짖어야 하는 건지. 눈을 작게 뜨고 그르렁 소리를 내야 하는 건지. 꽤 간절하게 묻고 싶었다. 사실 상처의 유무가 궁금했기보다는 상처받음에도 나아가는 법이나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이 알고 싶었다.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답을 알지 못한다. 나는 때 묻은 가련한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너무 많은 언어가 존재했다. 나는 나의 언어로 이야기했고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표현했다. 서투름에 꽤 지쳤고 지난함에 꽤 아팠다.
슬프게도 나는 우리처럼 계속 꼬리를 흔드는 것이 두려웠다. 개는 상처 받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고민했다. 사실 무엇이 두려운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새롭게 받을 상처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받은 상처가 곪을까 두려운 것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도대체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에 대한 의문을 말아 불에 태워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