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인 대구를 찾은 날, 시어머니께서 남편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을 꺼내오셨다. 어느덧 빛이 바랜 사진은 그 시절 특유의 색감이 입혀져 있었다. 사진 속엔 시어머니의 센스가 돋보이는 패션을 소화한 두 형제가 찍혀 있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연신 사진을 보며 옛날에 어떻게 두 형제를 키웠으며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지난 추억을 되짚어가며 말씀하셨다. 옆에 앉은 아버님도 중간중간 말을 섞으셨으나 시어머니께서 더 신난 듯 말한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앨범을 한 번 들추니 시댁에서의 술자리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온다. 도란도란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가지고 웃고 떠들게 만든다. 나만 모르는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기억 속 너머 지난 이야기들로 술안주를 삼을 수도 있는. 그렇게 오랜만에 모인, 나를 제외한 그들은 그때를 추억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난 마치 구연동화를 듣는 듯 이따금 리액션을 취했다. 남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시부모님이 살아온 그 시절의 환경 속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남편이 느꼈을 감정이 이따금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여전히 그 사랑이 담담하게 내게도 전해지는 그 자리가 좋았다.
내게 앨범은 부모의 사랑이 담긴 하나의 증표 같다.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지나칠 것이 없는, 부모 눈엔 어느 것 하나도 예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들. 나는 내 부모가 아닌 내 남편의 부모로부터 그 증표를 보고야 말았다.
갈라선 나의 부와 모에게 나는 자식에 대한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너머의 문제가 있었나 보다. 그래서일까? 내겐 그 흔한 가족사진조차 없다. 물론 몇 장의 사진은 있으나 그것은 내 기억에 없는 나의 모습뿐이다. 아쉬운 대로 나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만이라도 챙겼었나 보다. 동생은 아빠와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나는 그걸 떠올릴 때마다 무척이나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아빠와 찍은 사진 한 장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 앞에서는 내색할 수 없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어느 날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빠의 집에서였는지 시골에서였는지 나는 우연히 나의 모의 얼굴이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 기억 속에 없는 모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였는지 아니면 다른 곳이었는지 다시 본 사진은 아직도 너무나 잊히지 않고 생생하다. 날 선 가위로 오려낸 모의 얼굴. 그녀의 얼굴을 잘라낸 건 누구였을까? 나의 아빠였을까? 아니면 할아버지였을까?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려진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는 못 본다는 사실보다 그걸 오려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지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오려낸 이의 마음이 어쩐지 자신의 마음을 난도질하듯 오리고 잘라낸 듯해 보여 그 사진이 그렇게 슬펐던 게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갖고 있던 앨범 속 사진은 두 분의 결혼과 자식인 아빠와 그 밑의 동생들인 고모들의 사진으로 쭉 이어진다. 그리고 아빠의 딸들인 우리도 몇 장. 고모가 연휴 때 내려와 같이 본 사진을 보며 나의 아빠가 어린 시절 축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태권도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게 앨범은 부모의 사랑이 담긴 하나의 증표 같았다. 그러나 그 증표가 이 앨범엔 왜인지 모르게 사무치게 아픈 것이 담겨 있다. 남편의 앨범과 달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앨범 속엔 슬픔, 기쁨, 후회, 미련도 있어 보였다. 그 앨범은 왜인지 모르게 한 구간에서 슬퍼진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식인 아들이 내겐 아빠여서일지도 모른다.
앨범엔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사연이 담겨있겠다고 마냥 행복하지도, 마냥 슬프지만도 않은 우리의 인생이 담긴 증표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