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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피 Apr 05. 2023

천연

하늘이 맺어 주어 저절로 정하여져 있는 인연



 깜깜한 그 밤, 달 하나가 밝게 비추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우는 소리가 잦아들 것 같지 않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찾아올 리 없는 이를 애달프게 불렀습니다. 그 밤, 까마득한 밤을 보며 앞이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당신도 알 수 없기에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묵묵히 들으며 그저 안아주는 것뿐이었을 테지요. 그게 내 기억이었는지 내가 만들어낸 착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는 그 밤이 내 오래된 기억 중 당신과 처음을 마주한 순간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해였을까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그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당신은 소리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당신은 내가 가야 할 소풍날 먹을 김밥을 만들기 위해 그리 부산스럽게 움직였지요. 얇은 나무판자 사이로 당신의 움직임이 들리니 나는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갓 지은 밥 위로 참기름과 소금 간을 한 달짝지근한 밥에 단무지와 노릇노릇하게 구운 햄과 게맛살, 노란 계란 지단이 들어간 김밥을 만들어냈습니다.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김밥의 꽁다리를 주워 먹으며 김밥을 마는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지요. 당신의 희고 검은 머리카락이 김과 밥처럼 뒤섞여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에 난 주름도, 손에 난 주름도, 당신의 뼈대를 뒤덮은 살도 내가 처음 본 그대로라 생각했지요. 애석하게도 내 생각과 달리 당신은 그 주름에 또 다른 주름을 잇고 또 잇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러다 문득 당신의 허리가 조금씩 땅과 가까이 굽어져 가고 입 안으로 들어가는 밥알의 개수와 당신의 목 넘김, 당신의 숟가락질의 횟수가 날이 갈수록 짧아져 가고 있음을 나는 이번 재회에야 절실히 실감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아주 조용히, 내 깊은 곳에서 언젠가 일어날 일이 제발 가까워지지 않길 바라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을 맞잡은 날, 거칠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손은 하루도 쉬지 못해 손가락 마디마디가 두꺼워져 버렸습니다. 그 두꺼워진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살들은 당신이 지나온 세월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나도 거기에 내 몫을 보태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고 슬퍼 당신의 손을 꽉 움켜쥐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거칠고 투박한 손과 아직은 말랑말랑한 그 손의 온기가 쉼 없이 이어지길 나는 바랄 뿐이었습니다.     


 당신의 딸들은 더러 우리를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나가듯 들은 그 말에 나는 당신의 사랑이 딸을 지나 내게로 왔음을 그날 불현듯 깨닫고 말았습니다. 딸에게 준 것보다 더한 것들을 나는 값도 없이 분에 넘치게 받아왔다는 것을 말이죠. 당신의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에는 당신이 받고 먹지 않은 쌀과 미리 사놓은 김, 전복, 미역, 꽁꽁 얼려 놓은 생선, 직접 쑨 고추장과 된장, 참기름. 어느 것 하나 당신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것보다 당신이 내게 건네는 것의 순정이 비할 것이 없어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닿기가 이리 초라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리 곱게 크는 동안 당신은 나를 곱게 만드느라 당신의 몸 어느 곳 하나를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어깨에 얹어준 것이 짐뿐이라 내가 당신을 생각하면 흘릴 것이 눈물 밖에 없어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당신에게 내어 줄 것들이 마땅치 않음을 아오나 이 가엾은 아이를 거둔 당신에게 내가 받은 모든 사랑을 드립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또 당신을 만나 나의 가장 순수하고 꾸밈없는 사랑을 모두 남김없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음 생에도 당신과 연을 맺도록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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