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에필로그
지난 1년, 0에 다다르는 시간이었다. 30대에 승진보다 백수가 되기를 선택했고, 결혼보다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0에 가까워지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협하지 않기'였다. 주변에서 자신의 삶을 현실과 상황에 타협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나만의 속도와 길을 가기 위한 선택들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남들과 같은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알았다. 이제야 진정으로 0에 도달했음을.
0은 나에게 전환점이었다. 깊은 수면 아래까지 다다르면 그 끝에도 다시 박차고 올라올 수 있는 '바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 헤맨 후 바닥을 차고 위로 튀어 오르고 있다. 이제 다시 100을 향해.
2024년 1월 1일을 가족들과 함께 속초에서 보냈다. 반년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2024년 목표를 적을 때 '책 출판하기'를 썼다 지웠었다. 가장 간절히 바라는 꿈이었지만 곧바로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고 퇴사한 지 딱 1년이 되는 날 원고를 마감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매일매일 창작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관련된 책은 모두 다 찾아서 읽고 멋진 소제목까지 리스트업 했지만 실제로 내가 써 내려가는 글은 볼품없고 값어치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포기할까?'를 수백 번씩 반복했다.
마감이 이틀 남았을 때, 난 원고의 마지막 3분의 1을 다 채우지 못했다. 가장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건 '간절함' 하나였다. 이 기회가 나에게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이틀 동안 초인적인 힘이 나왔다. 결국, 마감날 저녁 10시에 최종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100을 향하는 길에 꽤 속도감이 붙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0에 도달했을 때 디딤돌을 박차고 올라왔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길을 잃지 않고 나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출판 소식을 알리기 위해 오랜만에 연락했다. 친구는 의젓한 한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었다. 친구는 자신의 꿈을 조금씩 이루어나가는 나를 보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 또한 친구가 아이를 키우는 어른이 되었다는 게 대견스러우면서도 닮고 싶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각자 살아갈 인생이 있는 것뿐이야"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찾은 이후로 더 이상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친구의 인생은 부러운 거 투성이지만 나는 나만의 인생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 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뿐이다. 각자가 원하는 인생과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다르기에 우리는 서로 경쟁상대가 아닌 응원상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유일무이한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나만의 인생에서 only one이 되고자 한다.
지혜 씨는 시속 30km만 달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 방전이 빨리 돼서 고속도로는 절대 타지 않고 어린이 보호구역만 다니는 경차 같달까요?
얼마 전, 지난 1년 동안 나를 지켜본 지인이 해준 말이다. 남들은 브레이크도 없이 고속도를 시속 100km로 쌩쌩 달릴 때 나는 동네 어린이보호구역만 다닐 것 같다고 언급했다. 신기하게도 실제로 나는 모닝을 타며 고속도로는 타본 적 없는 장롱면허 10년 차다.
하지만 나는 운전뿐 아니라 평소에도 느린 사람이다. 걸음도 행동도 성장도 느리다. 그러나 느려도 게으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느린 게 아니라 나만의 속도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나의 속도가 너무 느려 보이지만 나에게는 최대 속력인 것이다.
내가 나의 최선이 무엇인지, 나만의 속도가 몇인지 안다면 최대 속력을 내고 있을 때 스스로를 탓할 수 없게 된다. 게으름이란 스스로의 최대치를 알면서도 속력을 내지 않을 때 붙이는 말이다. 지인이 말한 것처럼 나는 방전이 빨리 되는 경차가 딱 적당하다.
나의 한계와 최대치를 통해 속력을 알게 되면 나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는 느리지만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