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느린 시선으로 보는 세상
여자의 인생
20대를 돌이켜보면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는 게 꿈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목에 사원증을 걸고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인생이 멋있어 보였다. 늘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보다 밖에서 사회생활 잘하는 여성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일하지 않는 여성'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나에게 어머니는 대표적으로 되고 싶지 않은 여성상이었다. 자신의 일없이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인생. 그로 인해 결국은 노년이 외로워지는 인생말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사춘기가 아니라 갱년기때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불행이라 여겨왔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가 자신의 역할에 지쳐 나에게 물어올 때면 그래서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겪는 문제들의 이유를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시켰다. 결국, 밖에서나 안에서나 존중받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그건 곧 이윤창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돈의 가치대로 살지 않았던 어머니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렇게 몇 해를 방황하고 위태롭게 지내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나에게 더 이상 똑같은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일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에 갇혀 낑낑대는 몰티즈 같았는데 이제는 집을 늠름하게 지키는 진돗개 같았다. 큰 폭풍에 의해 생긴 파도에 휩쓸려 저 멀리까지 갔다가 다시 떠내려와서는 잔잔한 파도에 둥둥 떠있는 사람 같았다.
여자와 고양이
우리 집 고양이는 꽤 느긋한 편이다. 집이 곧 자신의 영역 전부이기에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도 불만도 없다. 남은 묘생을 30평대 아파트에서 보내도 만족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양이에게는 집에 있는 인간에게 볼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하나 있다. 바로 당당함이다. 고양이에게 집은 곧 자신의 세계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인간에게 기생하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군다. 그래서 원하는 건 눈치 보지 않고 모두 요구한다.
큰 폭풍이 지나간 후, 어머니에게서 고양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가족들에게 나눠주던 닭다리를 이제는 먼저 집어 먹었고, 자연스럽게 심부름을 시키는 가족들의 요구를 가볍게 무시했다. 가끔은 하루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꺌꺌 대며 떠드느라 집안일을 미루기도 했다. 고양이처럼 여유로운 자세와 당당한 태도로 집에 머물렀다.
이들의 공통점은 '집'을 대하는 태도가 다름에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일 뿐이지만 이들에게 집은 자신들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을 떠나는 대신 정복해 버렸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집을 지키는 여자
나는 여전히 집을 지키는 어머니가 낯설다. 더 이상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지만 그녀가 만들어 둔 틀 안에서 벗어나면 큰일 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집의 모든 규칙과 규율은 그녀 손안에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것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가 항상 집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권리가 밖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권리는 집 안에 있었다. 그동안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사회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만큼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된 것이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집 안에서는 어머니가 가장 쓸모 있는 존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창출'을 못하는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 돈을 벌지 않으면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쓸모가 있다. 그곳이 다를 수는 있으나 없지는 않다. 우리는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게 아닌 자신의 쓸모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바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아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느린 시선을 통해 평소와 다른 관점으로 여러 대상들을 관찰했다. 동물, 아이, 여성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창출'을 할 수 없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했다. 내가 찾은 답은 자신의 쓸모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돈'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고양이와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당당히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자신들이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면서 자신의 쓸모가 '집을 지키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마음속 혼란이 오지 않은 것이다.
나의 쓸모를 알고자 달려온 지난 시간들을 통해 나 또한 나의 쓸모를 찾게 되었다. 남들처럼 빠르게 갈 수는 없지만 느린 시선으로 그들의 가치와 쓸모를 찾아주는 일을 하는 게 나의 쓸모임을 깨달았다. 결국, 나를 알아가는 여정 속에서 찾은 답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것만 알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