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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y 20. 2024

아이는 '사랑'으로 태어났다.

3-3. 느린 시선으로 보는 세상

동물만큼 아이도 좋아하세요? 
photo by Unsplash


나는 일명 '동물 덕후'다. 항상 '피카추'를 어깨에 올리고 다니는 지우처럼 나에게는 늘 '동물 단짝'이 있었다. 지금은 4년째 함께하고 있는 반려묘 '도도'가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나를 떠올릴 때 '고양이'와 연관 짓는다. 지나가다 귀여운 고양이를 보면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의외(?)의 구석이 있다. 한 번은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지혜 씨는 동물 좋아하면 아이도 엄청 좋아하시겠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아니요'라는 솔직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글쎼요.. 하하"라며 웃어넘긴 적이 있다.  동물을 그 정도로 사랑하면 당연히 '아이'도 좋아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아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은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동물을 좋아하는 감정과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감정은 정말 다를까? 
우리가 무엇을 선호할 때 그건 '경험'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기질적인 것일까. 




고양이와 아이는 다르지 않다.  
photo by Unsplash


지인들과 오랜만에 모인 식사 자리였다. 한 분이 최근 '출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아이'로 집중되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거나, 결혼 후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아이를 키워보니 어떠세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나는 그 대화에 끼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이'를 좋아하지도,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에 관한 수다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조차도 평소에 관심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열할 정도였다.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한 분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혜 씨는? 아이 안 좋아해요?"

나는 '안 좋아하는데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이 무리에서는 왠지 이해받지 못할 듯하여 말을 빙빙 돌렸다.

"글쎼요. 아이를 본적이 별로 없어서요.."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분이 눈치 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푸하! 그럴 수 있죠! 나도 아이 낳기 전에 애들은 거들떠도 안 봤다니깐!"

이내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띄우며 대화에 다시금 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조언쯤이나 해주고 싶었던 건지 호탕하게 웃던 분이 나에게 슬며시 귓속말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지혜 씨, 고양이 키우신다 했죠? 고양이랑 아이는 별반 다르지 않아요!" 



경험 없이 사랑은 시작되지 않는다.
photo by Unsplash


올해, 나에게는 '아이'를 경험할 일이 생겼다. 지인의 조언처럼 '아이'와 '고양이'는 정말 다르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교회에서 교사 사역을 고민하고 있던 시기에 전혀 예기치 않게 '유아부' 교사로 섬겨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청년교사'가 간절히 필요하다 하여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유아부'는 4-5살 아이들이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서 혼자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이제 막 4살이 되어 '유아부'에 온 아이들은 거의 몇 개월동안은 눈물만 흘리는 경우도 많았다. 새해가 되어 아이들을 처음 맞이하는 순간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서 있던 나에게 '담임 선생님'은 한 가지 임무를 주셨다. 아이들이 한 명씩 도착하면 안고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낯선 아이들의 조그마한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한 달 정도 불편하고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놀랍게도 어느 순간 귀여운 여자 아이 하나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땡그란 눈을 꿈뻑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항상 멍하니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아이는 나를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보고 싶어?"
아이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속 '엄마'만을 반복했다.

"엄마 좀 있으면 오실 거야. 그때까지 선생님이 손 잡아줄게"
그러자 아이의 작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꼬옥. 놓치면 엄마를 만나지 못하기라도 하듯 필사적으로 내 손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엄마가 도착하자, 아이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활짝 웃으며 있는 힘껏 엄마에게로 뛰어가 안겼다. 나는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아이의 작고 따뜻했던 손의 온기를 떠올렸다. 


'어머머 이렇게 쉽게 넘어간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아이를 좋아한다'는 선택으로 훌쩍 넘어가려는 걸 보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그동안 지켜온 뚝심이 있는데.. 




경험 없는 판단을 조심해야 한다.
photo by Unsplash


"동물을 왜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의 대답은 항상 "그냥 좋아요!"였다. 


정말 말 그대로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이 가진 조건은 나에게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흰 털을 가졌는지, 노란 털을 가졌는지 그리고 소심한지 대범한지는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취향적으로 '선호'하는 생김새와 성향은 있을 수 있어도 그것이 고양이라는 '존재'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인이 해줬던 조언처럼, 고양이와 아이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존재와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존재의 가치'를 말이다.


내가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은, 기질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경험이 많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동물을 이유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어떠한 조건'에 의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와 함께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부드러운 털, 작지만 빠른 템포의 숨소리, 따뜻한 온기, 특유의 냄새. 우리는 그 전부가 모인 하나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동물과 함께할 때 힐링되는 순간은 동물이 무언가를 잘했을 때가 아니다. 다른 동물들처럼 '묘기'를 부릴 때도 아니라 그냥 옆에서 함께 할 때 그 순간이 전부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선택한 이유는 '존재적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타인의 생각에 의존해 '섣부른 판단'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존재경험'이 없으면 '조건'에 의해 선택하게 된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도 시끄럽게 떠든다', '맘충들에 의해 개념 없이 자란다', '요즘 아이들은 영악하다'라는 누군가의 부정적 경험들을 나의 입맛대로 옳다고 판단하고 내린 결정인 것이다. 


 

 모든 가치는 존재 자체에 있다. 
photo by Unsplash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타인의 의견'이 아닌 '나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논리로 누군가의 '존재'를 판단할 때도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존재의 가치를 이야기할 '조건'을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는 함께해 본 경험이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경험이 줄어들수록 '존재'가 아닌 '조건'에 시선을 두게 된다. 아이를 몇 번의 간접 경험으로 '좋지 않다'는 선택을 했던 나의 오류처럼 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존재의 가치는 '물리적'으로 함께하며 서로의 온기를 느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사랑'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짜 사랑 앞에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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