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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May 18. 2020

쭈글쭈글해진 손을 만지며 잠에 든다

손이 쭈글쭈글했다. 수영장에 다녀오는 날이면 잠에 들 때까지 손가락 끝의 팽팽함이 돌아오지 않았다. 수분이 빠져버린 손가락을 만지작대는 습관. 오이장아찌 같은 내 손이 매번 신기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수영장으로 갔다. 힘든 훈련이 예상되는 날에는 당이 떨어지기 십상이니, 얼마 안 되는 초등학생의 꼬깃꼬깃한 용돈으로 ABC 초콜릿 한 봉지를 사 갔다. 초콜릿 10알 정도만 까먹으면 물살에 지쳐버린 기운을 조금이나마 차릴 수 있으니까. 수영장에 도착하면 우선 워밍업으로 접배평자 100바퀴부터 시작한다. 100바퀴라는 숫자를 10 단위로 나누어서 세다 보면 ‘열 번’의 셈만 하면 된다. 하염없이 물장구를 치며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세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버거웠다. 물 밖으로 고개를 돌려 숨을 쉬는 행위가 점차 힘들어지면 숨을 쉬는 것조차 귀찮았다. 살면서 ‘숨을 쉬는 것’이 귀찮아지는 때가 얼마나 자주 있을까. 당연한 것들이 당연시 여겨지지 않는 순간은 그 ‘당연한 것’이 지겨워질 때까지 나 자신을 몰아붙여봐야만 가능한 건가 보다. 그저 머릿속에는 이 ‘뺑뺑이 100바퀴’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어렵사리 찾아온 마지막 100번째 바퀴가 끝난 후 흠뻑 젖은 몸을 큰 수건으로 감싸고 수영장 옆 테이블에 앉는다. 눈 앞에는 아직 100바퀴를 돌지 못한 친구들이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다. 치열하게 튀는 물방울들과 물안경 속 보이지 않는 비장한 눈빛들이 수영장 분위기를 장엄하게 했다. 코치님들은 연거푸 박수를 치며 속도를 올리라는 고함을 쳐댔고 반사되지 못한 소리들은 머물 데를 찾지 못한 채 왱왱 울려만 댔다. 그래서인지 ‘고요하다’ 느껴졌다. 초콜릿 귀퉁이 연약한 매듭을 천천히 풀고 하나씩 입에 넣어 녹여먹는다. 그리고 다 까먹어버린 초콜릿 껍질들이 수영장 옆 테이블에 앙상히 놓여 있었다. 


친구들이 100바퀴를 다 돌고 나면 주종목 기록을 위한 훈련을 했다. 내 주종목은 평영 50m. 30초대의 기록은 필수. 다이빙대에 서서 호루라기 소리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린다. 차디찬 수영장 물에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니 다이빙대에서부터 소름이 돋는다. 삐-소리가 시작될 때 주저 없이 수영장 물속으로, 첨벙. 물속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수영장 바닥에 붙어 물질을 한다. 숨을 참고 오래도록 가다 보면 25m의 반 정도까지 다다를 수 있는데 그때서야 물 위로 올라와 치열히 동작을 한다. 


벽 앞으로 오기 0.5m 전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물 안에서 앞구르기를 한 후 쓱- 돌아 벽을 발로 찬다. 초시계를 들고 있는 코치님의 모습이 물 위로 올라올 때 보인다. 초시계의 마지막을 누르는 그 버튼이 조금 더 빨리 눌릴 수 있도록, 기록의 고지를 향해, 더 속도를 낸다. 드디어 손이 벽에 닿는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벽에 기댄 채 코치님의 입모양을 본다. 38초. 머리를 툭툭 쳐주는 코치님의 위안에 이내 물안경을 벗는다. 하루하루를 평가받는 숫자가, 그리고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스코어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전부였던 그때가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향해 가야 하는 수영은 나의 일상 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도 기르게 하지 않았을까.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모든 훈련이 끝난 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 것이었다. 차가워진 몸을 샤워기 앞에 두고 따뜻한 물을 맞으면 저릿저릿해지는 몸의 느낌이 참 좋았다. 따뜻해진 피가 온몸을 위로해주는 느낌. 그리고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래서 그 순간을 오래도록 좋아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데려다주는 차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머리를 대에충 말리고 뛰쳐나갔다. 겨울에는 머리가 가닥가닥 뭉쳐 꽁꽁 얼곤 했었는데, 꾸덕꾸덕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꾹 누르곤 했다. 금세 얼어버린 머리카락이 신기했던 것 같다. 줄을 기다랗게 서 있는 아이들을 태우기 위해 버스는 간격 조정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어두워져 버린 겨울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수영훈련을 다녀온 날이면 남은 초콜릿 몇 개를 까먹고는 몽롱해진 정신을 들고 잠자리에 향했다. 쪼그라든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스르륵 잠에 드는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했던, 내일의 더 나아질 나를 명확히 상상하며 잠이 들었던 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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