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라는 길 중심에서 무엇을 외치고 있는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故김선일 씨가 이라크에 의해 결국 참수되었단 소식이 아침 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참담했다. 그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국가가 그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한 사람으로서 아침 신문을 통한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참수 동영상이 배포금지가 되기 전에 나는 봤네 어쩌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나의 뒷자리에서 낄낄대며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너희 삼촌이나 아버지였다고 생각해봐. 그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
10대부터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한 알 수 없는 정의감'은, 옳지 못한 일을(나의 기준에서) 마주했을 때 그 생각과 행동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엄마에게 씩씩대며 따발총 쏘듯 이야기했을 때 '내 배로 낳은 자식이 맞나'라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이 사건으로 내 친구들과는 한동안 서먹서먹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회 정의 구현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 정도라면.
한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피 끓는 청춘 같은 10대의 한 자락 정의 실현 에피소드가 엉뚱한 곳에서부터 생각났다. 요가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람이 북적북적한 버스에 내 앞에 줄 서 있던 한 여자와 함께 타게 되었다. 두 정거장만 지나면 내릴 거라 바로 뒷자리로 향해 내릴 차비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도 나와 나란히 내릴 정거장을 기다리며 멍 때리고 있었다. 나가는 문 앞에 서 있었던 커플이, 내 옆에 서 있던 그 여자를 보며 킥킥대기 시작했다. "오빠, 나 저 여자만큼 뚱뚱한 건 아니지?" "야, 저 정도면 좀 심하지. 넌 귀엽잖아." 그 이후의 대화들이 이어지면서(적잖이 예상되는...) 그들의 이야기가 듣기 싫어, 듣고 있었던 노래의 볼륨을 키웠다. 이건 뭐, 사랑의 속삭임인지 죄 없는 한 사람의 의문의 1패인지. 그때 꽤나 가까이 있었던 그 여자는 그 대화를 들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 귓구녕에 뭐라도 꼽고 계시지. 차라리. 그 날따라 챙기지 못한 이어폰을 그녀도 후회하고 있을까. 철딱서니 없는 커플과 그 여자의 사이에 서 있으려니 참으로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커플들을 향해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나도 이내 고개를 떨구고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한껏 키웠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10대의 한 자락인 그 사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가졌었던 나의 이 정의감은, 의도치 않게 사람들과의 갈등을 만들어내곤 했다. 과외 선생님에게 예의 없이 행동하는 친구에게 한 소리를 하다 크게 싸우고 절교를 한 적도 있었고 왕따를 당하던 친구를 대신해서 나쁜 무리(?)에게 한 소리하다가 나도 졸지에 왕따 당한 적도 있었고. (이 정도면 만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던 '착한 역' 맞먹는 정의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는 나의 이 정의감이 가져온 갈등은 그렇게 어려운 감정은 아니었다. 나에게 떳떳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나이가 들 수록 어느 순간, 이 '정의감'이라는 것이 '오지랖'으로 스스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 표현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을까.
둥글둥글하게 살면 되는 것을. 둥글둥글하게...
같은 상황과 같은 장소에서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이 사회에서 '튀지 않고' 그들과 땅따먹기 하듯 너는 너의 영역, 나는 나의 영역에서 서로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자. 난 너의 행동에 눈을 감고, 난 너의 말에 귀를 닫을 거야. 그러면 모두가 행복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길을 걷다 '도를 아십니까'에 끌려가는 여자를 보아도. 그 여자를 구해줘야 할까 말까 하는 나의 망설임도 '오지랖'으로 치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나름 편했다.
꽤나 본성을 숨기고(?) 살았던 터라 버스에서 느낀 이 감정은 오랜만이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나의 '쓸데없는 정의감'을 탓하면서 버스에서 터덜터덜 내렸다. '그래.. 나의 10대가 생각나네.' 그때였던 것 같다. 그때 나의 정의로웠던 10대가 생각났던 것 같다. 천사소녀 네티 뺨치게 정의롭지 못한 광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왠지 모르게 몸 사리고 치사해진 60대의 은퇴한 히어로 같았다. (60대는 한참 멀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우짜누.)
나름 오지랖 같아도 할 말은 하면서 사는 게, 정의롭지 못하고 사회에 반하는 것들에 한 마디 던지는 게, 뭐 그렇게 남의 눈치 볼 일이었을까. 둥글둥글하게 산다는 자기 합리화로 눈 감고 지나갔던 부조리한 일들이 난 얼마나 많을까. 나 편하자고 택한 행동에 그 누군가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돌팔매질당하지 않았을까. '10대의 정의로운 나'답지 못한 나의 지금은, 이제 나답다고 해야 할까 나답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