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지현 May 19. 2022

이렇게 축하받으며 퇴사하긴 처음이다

영국에서 첫 회사를 떠나던 날

‘퇴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연상되는가? 한국 회사를 다니던 때를 떠올려 보면 퇴사에 관해 긍정적인 인식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컸다. 새로운 직원이 입사할 때는 팀 단체 회식을 잡아 격하게 환영해 주지만, 몇 년을 함께한 직원이 퇴사할 때는 조용히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송별회를 하더라도 친한 직원 몇 명끼리 소규모로 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아무래도 퇴사자로 인해 팀에 남아있는 다른 직원들이 동요될까 우려되어 이렇게 퇴사에 대해 쉬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조직에게는 부정적 일지 모르겠으나, 당사자에게 퇴사는 긍정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스스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내린 선택이기 때문이다 (해고가 아닌 자발적 퇴사인 경우). 퇴사 이후에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게 다른 직장이든, 아예 새로운 직업이든, 인생의 다음 챕터를 위한 휴식이든 새로운 시작은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회사를 떠나는 사람을 축하해주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영국에서 첫 회사를 떠났을 때, 이렇게 퇴사를 축하해 주는 문화를 처음으로 경험해 보았다.




떠나는 동료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Leaving-Do

영국에서는 퇴사자의 송별회를 보다 크게 하는 편이다. 물론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의 경우 누군가 퇴사를 하면 60명 남짓 되는 전 직원이 초대되는 송별 파티가 열렸다. 영국에서는 이를 Leaving-do라고 부르는데, 퇴사를 축하하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는 송별 파티이다.


역시 송별회에 술이 빠질 수 없다. 당시 우리 회사에서는 퇴근 시간 이후 사무실 카페테리아에 모여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나, 참석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경우에는 가까운 펍에 가기도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사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떠나는 직원에 대한 덕담을 해주는 모습이나, 퇴사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라며 마이크를 떠미는 모습은 여느 한국의 회식과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동료들은 퇴사자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주고, 다음 회사에서도 잘할 거라며 훈훈한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송별 파티를 생략하거나 소수의 인원만 초대해 작게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굉장히 아쉽다. 송별 파티를 통해 퇴사하기 전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제대로 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는데, 요즘은 누군가 퇴사해도 메신저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게 전부다. 매일 함께 일하던 동료의 새로운 시작을 얼굴 보고 제대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와 동시에 혹여나 송별 파티가 코로나 파티가 될까 우려되어 조심스러워진다. 다시 마음 놓고 크게 송별 파티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퇴사 선물과 롤링페이퍼 카드

팀원들이 준비해 준 퇴사 선물과 카드


퇴사 당일이 되자 팀원들이 미리 준비한 퇴사 선물과 카드를 전해주었다. 여행을 좋아해서 종종 동료들에게 유럽 여행지 추천을 받곤 했는데, 팀원들이 이걸 기억하고 퇴사 선물로 유럽 여행 책을 세 권이나 사줬다. 그리고 책 보다 더 큰 카드에 수십 명의 동료들이 적어 준 축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돌려가며 적던 롤링페이퍼를 연상하게 하는 빽빽한 카드였다. 카드 커버에 있는 “네가 없으면 예전 같지 않을 거야... 훨씬 나을 테니까!”라는 문구는 지금 봐도 나를 피식 웃게 한다. 누가 골랐는지 참 잘 골랐다.


퇴사 카드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No one sings Bruno Mars better than you. Stay just the way you are! - J

Bruno Mars 노래를 너보다 잘 부르는 사람은 없어. 계속 너답게 지내(Bruno Mars 노래 제목 인용)! - 동료 J


한 번은 누군가 사무실에 미니 노래방 기계를 가져와서 퇴근 후 사무실이 노래방으로 돌변한 적이 있었다. 노래방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영국인들은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수줍었는지 생각보다 나서 부르질 않았는데, 그와 달리 K-노래방에 익숙한 나는 동료들을 끌고 데려가 신나게 무대를 장악했다. 그중 한 곡이 동료 J와 함께 부른 Bruno Mars의 <Just the way you are>이었는데, J는 그게 꽤 기억에 남았는지 퇴사 카드에까지 이 얘기를 적어줬다. 평소에 내가 이런 데서 잘 나서는 편은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나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반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20년 넘게 노래방 근육을 다져온 건 모르겠지?


Best of luck with your new job - you will be fabulous. Thanks for being a great spinning buddy! - G

새로운 직장에서 행운을 빌어. 넌 거기서도 분명 잘할 거야. 좋은 스피닝 짝꿍이 되어줘서 고마워! - 동료 G


각종 운동을 섭렵하던 동료 G의 추천으로 나까지 다섯 명이서 퇴근 후에 같이 스피닝 클래스에 간 적이 있었다. 다들 재미 삼아 갔다가 예상치 못한 격한 운동 강도에 압도당해 버렸는데, 들어갈 때는 멀쩡하게 걸어 내려갔지만 나올 때는 벽을 짚으며 겨우 계단을 올라왔을 정도다. 심지어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다리가 풀려 창피하게 혼자 넘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열심히 페달을 밟던 그 시간만큼은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고, 그 에너지가 근육통을 뛰어넘었다. 그날 이후 스피닝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다리 힘을 되찾을 때쯤 G가 다니는 스피닝 클래스에 등록했고, 퇴사한 이후에도 3년째 꾸준히 다니고 있다. 나를 스피닝의 세계로 이끌어 줘서 고마워, G!


You know how happy I am for you. I really hope you’ll have fun there and you’ll have an opportunity to grow in the direction you wanted. - D

네가 잘 돼서 내가 얼마나 기쁜지 알지? 다음 직장에서 즐겁게 지내고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할 기회도 꼭 얻길 바랄게! - 동료 D


회사에서 가장 친했던 동료 D의 진심 어린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 옆자리에서 일하며 우리 팀에서 있었던 모든 우여곡절을 함께 겪었던 동료다. 이 친구와는 처음 퇴사를 망설이던 때부터 함께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주고받으며 힘든 시기에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내가 퇴사를 결심한 이유와 이직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친구였기에, 누구보다도 나의 이직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D도 나의 퇴사 후 몇 달 뒤에 이직에 성공해서 새로운 직장에서 지금까지 만족하며 잘 다니고 있다.


퇴사 카드를 쭉 읽다 보니 이 회사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좋은 기억도 정말 많았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좋은 기억을 만들어준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영국 땅에 혼자 와서 다른 곳도 아닌 회사에서 이렇게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건 다시 생각해도 천운인 것 같다.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이렇게 과분한 축하를 받으며 떠날 수 있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퇴사한다는 동료가 있으면 아쉽다는 말 대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다. 물론 가까운 동료가 떠나는 건 아쉽지만, 그가 깊은 고민 끝에 본인의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쉬움은 잠시 접고 함께 기뻐해 준다. 모든 퇴사자가 걱정과 우려 대신 응원과 축하를 받으며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퇴사는 축하받을 일이기에!


이전 19화 퇴사 이유를 캐묻는 영국 회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