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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현 Dec 16. 2021

대리 진급, 그리고 퇴사 결심

엄 대리는 왜 퇴사를 결심했을까

"엄 대리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회사에 다닌 지 3년이 지나 대리가 되었다. 우리 회사의 대리 승진 조건은 신입으로 입사해서 3년이 지나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자격증을 따면 다 대리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승진보다는 호칭 변경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일을 잘해서 이뤄낸 성과라기보다는 이 회사에 3년을 성실히 다녀서 받은 개근상 같은 느낌이었다. 개근상 정도는 충분히 받고도 남을 정도로 열심히 달려온 3년이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을 배웠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가끔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말에 출근해서 일을 더 하고 갔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이 좋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그랬다. 이렇게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하는 나를 보며 사수 과장님은 몇 달만 지나도 만족감이 떨어질 거라고 예견하셨다. 몇 달보다는 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과장님의 예견대로 어느 순간 그 만족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3년간 같은 팀에서 일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팀 이름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하는 일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무늬만 살짝 다른 비슷한 일을 계속하고 있었고, 새로운 일을 배울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엔 배울 게 많아 버겁기까지 했던 일도 3년을 하니 익숙해지고 쉬워졌다. 그리고 일이 익숙해진 만큼 남들에게 인정도 받았다. 이 회사에서는 성과 평가를 1년마다 A, B, C 등급으로 나눠서 매겼는데, 지난 연말에 성과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A를 받았다. 이대로 계속 이 팀에서 같은 일을 하면 이번 연말에도 A 등급을 받을 것이었다. 이때까지 쌓아 놓은 게 있으니 이번 성과 평가는 작년보다 쉬울 것이고, 내년에는 이보다 더 쉬워질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런 쉽고 편한 회사 생활이 이상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아니었다.


"개발자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야."


20년 넘게 개발자로 근무하신 친구 아버지는 이 얘기를 하시며 친구가 개발자가 되는 걸 말리셨다고 한다. 한 번 기술을 배우면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직업도 있는 반면에 개발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IT 세계에서 계속 생겨나는 신기술을 익혀야 이 바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거다. 자식이 생존을 위해 평생 공부해야 하는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바로 내가 개발자가 된 이유였다(그리고 아버지가 말리셨다던 그 친구도 개발자로 살고 있다). 나는 새로운 걸 배우는 그 과정 자체를 즐거워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 누구보다도 지루해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평생 배워야 하는 직업'이라는 개발자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당시 나의 회사 생활은 배움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 팀은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다른 회사에 판매하는 일을 했다. 우리의 타겟 고객에게 우리가 얼마나 혁신적인 기술을 쓰고 잘 짜여진 코드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00하는 기능은 없나요? 다른 데는 있던데..." 고객님이 이런 말씀을 한마디 던지시면 우리는 00하는 기능을 추가해야 했다. 그렇게 고객사의 요구사항에 맞춰 단순한 기능을 추가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비슷한 일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생 배워야 하는 직업'인 줄 알았던 개발자로 일하던 회사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사원 시절에 회사 생활에서 느꼈던 즐거움은 배움과 성장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게 줄어들자 회사 생활이 급격히 지루해졌고, 벗어나기 힘든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슬럼프에 빠진 사람은 뭘 해도 재미가 없다. 당시 내가 그랬다. 일만 지루해진 게 아니라 모든 게 지루해졌다. 지인들에게 뭘 하면 인생이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누구는 주식을 시작해보라고 했고, 누구는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했다. 어떻게든 재미를 되찾고 싶었던 나는 이 모든 걸 다 해봤다. 주식 계정을 열어 당시 핫하다는 주식을 몇백만 원어치 매수하기도 하고, 새로운 취미로 테니스를 배워보기도 하고, 테니스 모임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하지만 매일 하는 일에서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으니 쉽사리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에서 만족감을 되찾아야 했다. 물론 여기서 팀을 옮기거나 이직을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변화가 필요했다. 영국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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