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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22. 2020

막연한 위로와 소통은 이제 그만...

위로와 힐링과 소통이 상품이 된 요즘...

특별히 위로해야 할 사건, 그래서 진심 어린 위로를 받아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그냥 막연하게 사용되는 위로, 소통, 힐링 뭐 이런 말들을 듣기가 왠지 점점 불편해졌는데 요즘에는 식상하다.


특히 이런 것을 소재로 모호하게 한 덩이로 묶어서 듣는 사람, 읽는 사람들의 한 명 한 명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내 삶은 이렇게 힘들었어. 너희의 삶은 힘들고 고통과 상처 투성이었어"라고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그런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 같아서 언짢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에는 불꽃이 튀는 것 같이 짧은 순간 이언정 축제 같고, 기쁜 시간이 있다. 이런 순간들을 축하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 같아서 섭섭하다.

10년 전인가.. 한 기업인과 주식투자로 자산관리 기술을 연마한 의사 출신인 사람이 팀을 이루어 "소통"을 언급하며 기성세대가 만든 이 사회에서 불특정 다수 청년은 살아가기 너무 힘들다고 전제를 깔고 "위로"하는 강연을 하고 다닌 이후부터에 우리말에 소통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급상한 것 같았다. 그 사용 영역도 문어나 전문분야가 아닌 구어로 넓혀가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적어도 내게는 "의사소통"이라고 사용하는 것이 여러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왜 저 사람들은 왜 앞 단어 "의사"는 빼고 소통이라고만 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후 "소통"이라는 단어는 청년층에서 장년층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구어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사용 영역도 넓어졌다. 그 후 많은 도서가 위로와 소통을 주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를 주제로 하는 행사, 강연들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지금은 포화상태가 된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청년들 편이었던 같았던 그가 안전사고로 사망한 한 청년에게 그렇게 "힘든"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런 험한 일 안 당했을 텐데 불쌍하다는 식의 언급을 했다. 사건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말. "힘든"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한다는 그의 세계관에 많은 청년을 실망하게 한 사건이었다. 노동환경과 처우만 개선돼도 그 일은 그 일을 잘하거나 적성에 맞는 사람에게는 힘든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자랑스럽고, 재미있는 일이어야 한다. 보수도 높아야 하고, 많은 이의 안전을 다루는 위험관리 업종 중 하나로 인식되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말하는 이, 혹은 글 쓰는 이와 그의 말이나 글은 분리해야 한다고 해도 이 두 모습이 너무 다르면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말과 글의 진실성과 신빙성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얼마 전 미국 명문대 출신이라는 어느 사업가/승려는 전파하던 위로와 천천히 살기, 힐링 등으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왔다. 무소유와 속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였던 불교에서 승려의 적극적인 방송활동과 각종 이윤 창출 사업활동을 허용하는 것이 의아하긴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책과 강연 등을 통해 전파한 그의 말과 동떨어진 호화로운 삶, 자산, 개인 자산을 자신이 주요 이권자로 있는 종교단체 자산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매도 매수가 차익 및 탈세 의혹 등 여러 문제가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여러 통로를 통해 그에게 시간과 경제적 대가를 치르고 위로를 받던 많은 사람이 그의 실제 삶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 사이의 모순에 불쾌해한다.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 (자칭 "환경을 걱정하는 아스퍼거"라는 환경보호 활동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청소년으로서 국회 앞에서 일인 시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 후 각종 연설, 유엔 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이런 활동을 통해 환경문제가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후 부모와 함께 여행하며 일회용 컵과 플라스틱 봉지를 마구 사용하고, 행사 지원 인력을 비행기로 동원하는 등의 행위를 들킨 이후 어떤 이들은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환경 장사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배우 출신에 피아니스트인 부모가 공감능력과 감정 표현이 힘든 아스퍼거 증후군인 아이에게 표정 연기 등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등의 아동학대라는 비난도 받았다.

소통과 위로라는 말은 고유의 의미는 변질되고 원래의 가치를 잃은 것 같다. 소통과 위로 컨텐트 시장도 이제는 레드오션이 되었다.


우울증이나 심한 과로를 실제로 치료할 때 환자가 겪은 과거의 사건이나 상처 분석, 소위 "내면의 아이"를 위로하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인지 방법 바꾸기를 가르치고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실현, 성취감을 맛보게 하고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면 마음 대신 몸을 쓰는 것, 긴 산책, 가벼운 운동 그 후 숨찬 운동 등을 하게 한다. 몸은 지금 여기에 늘 나와 함께 하지만 생각은 과거 미래 있지도 않은 기억과 공상의 세계로 도망을 잘 가니까.

몇 년 전에 한 좋은 선배가 젊은 나이에 슬프게도 병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선배는 페북을 읽지도 못할 텐데 선배의 페북에 많은 "친구"로부터 조문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서 페붘을 탈퇴하려다가 얼마간 비활성화했다.


얼마 전에는 잘 알고 지내던 한 어른께서 소천하셨다. 그 후 카톡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단체 메시지가 여기저기에서 올라왔다. 만난 적도 없는 연예인의 사망사건도 아닌데, 그리고 그런 매체를 이용하기에 너무 진중한 사건인데... 왠지 그런 메시지의 불특정 다수 수신자 중 한 명이 되고 싶지 않아서 단체 카톡방을 나왔다. 설마 이런 소통이 고인의 가족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소통과 위로라는 단어가 과용되면서 이 단어들의 희소가치가 높던 시절에 "위로"와 "소통"에 해당하는 행위와 요즘의 모호한 위로와 소통이 지칭하는 광범위한 행위를 혼동되는 시대가 온 것인가?


위로란 무엇일까?


갑자기 울려오는 전화 한 통, 사람의 목소리, 전자우편이라도 소소한 근황과 살면서 느낀 감상을 쭉 써 내려간 소식, 그리고 정말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할 때 말을 많이 안 해도, 차 한잔, 밥 한 끼 나누며 바빠도 바쁜 티 안 내고 묵묵히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 마음이 느껴지는 만남이 어려워서 그 희소가치도 커진 시대가 된 것 같다.


과거의 상처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일어나서 하늘을 한 번 보고 고개 들고 어깨 펴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는 없을까. 열 살만 넘어도 마음의 상처나 사연하나 없는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 아픔의 크기는 주관적인 것인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심장은 뛰고 있고 있다. 이 심장이 영원히 뛰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마치 100알의 캐러멜이 든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씩 꺼내먹는 것 같다. 이 인생이라는 사탕 봉지에는 스웨덴/핀란드 국민 사탕인 라크리스 (감초) 첨가 사탕처럼 쓴 맛도 있고, 달콤, 새콤한 맛, 바나나 맛, 딸기 맛, 심지어 초코 맛도 있는 것 같다. 사탕인 줄 알고 입에 넣었는데 돌멩이인 적도 있다. 내 손에 들린 그 주머니에 남은 사탕은 매일 하나씩 줄어든다. 이것만으로라도 언젠가 이 세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 나와 지금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건, 낙엽, 끄물끄물한 하늘에서 갑자기 얼굴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 가는 빗날조차 상쾌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이유가 충분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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