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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um Musica Feb 27. 2024

1970년대 튀빙겐 클럽 볼테르의 역사



   68 혁명 이후 독일 클럽문화의 시작


68 혁명 이후 1970년대 초반 독일에서는  하위문화로서의 젊은 세대를 위한 클럽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청년들은 기성세대와는 구별되는 그들만의 독립적면서 창의적인 문화를 구현하기  위해 대안 공간으로서의 클럽에서 모였으며, 청년들이 모인 클럽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들, 예를 들어 재즈 및 포크송 콘서트, 정치적인 토론회 및 낭독회 등이 열리기도 하였다. Siegfried (2006)는 그 당시의 청년 세대들이 주도했던 클럽 문화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Siegfried에 의하면, 클럽 문화는 기존의 정치사상 및 권위적인 부모 세대와 학교 교육에 대한 반발의 수단으로써 독자적인 새로운 청년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청년들에 의한 클럽 문화의 시작은 독자성, 자주성, 진보성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클럽 문화의 태동의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진보적인 정치적 노선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기존 세대의 보수적인 정치사상에 반발함과 동시에 진보적인 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기 위해 클럽 문화가 형성되었다. 두 번째는 청년들의 진정한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특히 청년들은 부모와 학교 교육의 권위적인 측면에 대항하여 그들만의 독자성을 지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고 싶어 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클럽 문화 형성을 위한 움직임은 기존 세대와는 구별된 자신들만의 독립적이면서 새로운 문화 창출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독일 튀빙겐의 68 혁명 및 클럽 볼테르의 역사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튀빙겐은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위치한 인구 9만 명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독일 안에서 대학도시로 유명하며, 독일의 철학자 헤겔 (Hegel)과 셸링 (Scheling)이 튀빙겐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시인 횔덜린 (Hölderlin)과 천문학자 케플러 (Kepler)등을 배출한 독일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독일의 다른 도시에 비해서 학생 비율이 높은 도시이기 때문에 독일 안에서도 진보적인 정치 및 문화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럽 다양한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튀빙겐에서도 68 혁명의 여파가 매우 큰 편이었다. 특히 68 혁명 당시 튀빙겐 대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이 시위는 무려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튀빙겐 시내뿐만 아니라 학교 건물에서 모여 반전 및 반미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학생들은 독일 좌파당에 속한 진보적인 정치인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며 튀빙겐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시위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다른 독일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68 혁명을 기점으로 튀빙겐 안에서도 청년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클럽 볼테르” (Club Voltaire)라는 청년문화공간이 생겨났다. 클럽 볼테르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이름을 따서 만든 클럽이었으며, 1970년 튀빙겐의 구시가지에 위치한 Haaggasse 26번지에 세워졌다. 클럽 볼테르에서는 청년들에 의해 주도된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는데 음악회, 영화 상영, 토론회, 낭독회 등이 주된 행사들이었다. 19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클럽 볼테르는 청년들의 문화 행사 주최뿐만 아니라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 행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의 모토는 클럽 볼테르가 추구하는 가치관 및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은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는 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들에 주목했으며, 더 나아가 환경 문제 및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음악인들이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되었으며, 이들은 공연뿐만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그 당시에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토론하고 해결방안들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제3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

제3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은 1977년 6월 3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렸으며, 민중가요 콘서트 및 정치 토론회 및 워크숍에 초점을 맞춘 행사였다. 이 행사의 주요 모토는 튀빙겐 출신의 유명한 인물들인 횔덜린 (Hölderin), 셸링 (Scheling), 헤겔 (Hegel)이 주장했던 프랑스혁명의 의의였으며, 다양한 민중가수들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독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럽 국가 및 남미 출신의 민중가수들이 초청되기도 하였다. 초청된 민중가수들은 자기네 나라의 민속 선율 및 춤을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남미 출신의 가수들은 자신들의 전통 타악기들을 직접 가져와 연주하기도 하였으며, 관객들에게 전통 타악기들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아일랜드 출신의 민중 가수는 아일랜드 전통 민요인 켈틱 선율을 차용한 민중가요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즉 제3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은 다양한 국가 출신의 민중가수들이 초청되어 국제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는 한편, 초청된 민중 가수들이 자신들의 출신 지역의 전통 음악, 악기, 춤에 대해 알리고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는 이른바 지역주의 (Regionalismus)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제4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

제4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은 1978년 6월 9일부터 6월 11일까지 열렸으며, 특히 칠레의 유명한 민중 가수인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1932-1973)의 추모가 주요 모토였다. 이러한 행사 모토로 인하여 특히 행사에 참여했던 민중가수들 중에 남미 출신이 많았으며, 이들은 빅토르 하라의 정치적 희생과 업적을 주제로 한 다양한 노래들을 선보였다. 또한 빅토르 하라의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강연과 워크숍이 열리기도 하였으며, 독일 및 유럽의 민중가요 및 노동요들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제5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

제5회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은 1979년 6월 1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렸으며, 주요 모토는 독일의 민중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영화음악가인 한스 아이슬러 (Hans Eisler, 1898-1962)의 작품세계에 대해 논의되었다. 한스 아이슬러는 ‘예술 지상주의’에 반기를 두었으며,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인 작곡기법 대신 민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민중가요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한 작곡가로 유명하다. 또한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한 워크숍과 강연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스 아이슬러를 주제로 한 워크숍에서 ‘서베를린 아이슬러 합창단’ (Westberliner Eisler Chor)과 함부르크의 음악 그룹인 ‘Hinz und Kunst’는 한스 아이슬러의 독창곡 및 합창곡들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클럽 볼테르와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의 의의

1970년대부터 매년 열렸던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음악인들을 주요 모토로 삼아서 이들의 다양한 음악 작품을 소개함과 동시에 이들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클럽 볼테르는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 개최를 위해 장소 제공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후원 및 행사 홍보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의 클럽 볼테르와 튀빙겐 음악 페스티벌의 의의는 68 혁명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 즉 독자적이며 창의적인 청년 문화의 형성과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기존의 보수적인 세대를 거부하는, 진보적이며 저항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음악 문화를 전파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튀빙겐 클럽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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