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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28. 2020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달과 6펜스> by 서머싯 몸

달은 유독 작가들의 선택을 많이 받는 총애의 대상이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소원, 꿈, 이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최면을 거는 신비한 존재이자 불길한 일을 불러오는 흉조로 표현되기도 하는 달을 작가들은 인간의 이상이자 매혹적인 신기루,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으로 그린다. 그들은 달콤하지만 쓰디쓴 추락과 타락을 부를 수도 있는 달의 위험한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성경 속 인물인 침례자 요한과 살로메의 이야기가 오스카 와일드의 시선으로 새롭게 탄생한 희곡 『살로메』에서 달은 죽음의 징조를 토하는 섬뜩한 존재이다. 이 희곡에서 달은 무덤에서 기어 나온 여자, 죽은 여자, 실성해 벌거벗은 여인, 술에 취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반대로, 다른 이의 눈에는 더렵혀지지 않은 순결한 숫처녀, 어여쁜 공주님의 호박색 눈동자로 보이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오셀로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건 바로 달의 이탈 때문이야. 보통 때보다도 지구에 가깝게 내려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거지.’라며 인간 광기의 원인으로 달을 탓한다. 작가들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나 불가사의한 감정을 묘사할 때 달을 빌려오는 만큼 달에게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상 그 자체로의 달의 속성을 장엄하면서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달과 6펜스』가 있다. 소설 안에서 달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작품해설에서 볼 수 있듯 달은 ’상상의 세계나 광적인 열정을 상징’한다.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이 생의 후기를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달과 6펜스』에서 고갱은 서머싯 몸의 펜을 통해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예술가로 재탄생한다.


스트릭랜드는 증권 거래소에서 일하는 주식 중개인으로 따분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다. 스트릭랜드 가족은 그 누가 봐도 가장 평범한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으로 그 가족과 교제하며 오랜 시간동안 그들을 곁에서 지켜본 화자가 그들의 삶에 대해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 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수면 위는 고요하지만 언제 요동할지 모르는 파도를 품고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너무 평범했기에 사람들이 그 어떤 특별함이나 기행도 기대하지 않았던 스트릭랜드는 그들의 미온적인 평가에 반발이라도 하듯 어느 보통의 하루, 홀연히 아내와 자녀들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이런 행동을 저지를만한 배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이 마흔 안팎의 주식 중개인의 갑작스런 일탈은 모두의 노여움과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모두가 여자에 빠져 그녀와 도주했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를 설득하러 간 화자에게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 스트릭랜드는 그런 이유에서 예술과 문화가 숨 쉬는 파리를 목적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가족까지 버리면서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그림을 좇겠다고 선언한 스트릭랜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던 화자는 그 동기를 이렇게 짐작해본다.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의 본능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창조 본능은 그동안 삶의 여러 정황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자라듯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 모두를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까지 몰아간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예고도 없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스트릭랜드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를 떠오르게 한다. 영혜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특별한 매력이 없는 대신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눈에 띄는 정열은 없을지언정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보장된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 안에서 꿈틀대던 무언가가 밖으로 터져 나왔고 결국 그녀는 비정상이 되었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영혜는 단순히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고기는 다수가 섭취하는 정상적인 범주 안에 있는 먹을거리였고 그녀 자신은 그 범주 밖을 맴도는 소수였다. 영혜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원했던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을 테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사회와 주변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평범하고 무난한 삶에 교살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영혜는 자신을 내어주고 그 무언가를 살렸다.


누구도 스트릭랜드와 영혜의 예고 없는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 그들의 변화를 이기심에 연유한 것으로 보았지만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원시적인 본능에 순수하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순응한 그들을 감히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우리보다 몇 십 배는 더 용기 있는 동물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가 따분해진 런던을 떠나 한동안 머무르러 간 파리에서 만나 친분을 맺게 된, 그 누구보다도 정확한 예술 작품을 보는 눈을 갖고 있는 화가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그림이 그곳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결국 뛰어난 예술작품을 알아보는 눈은 경험이다.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의 눈에 예술가의 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고뇌는 그저 허영과 이기심의 껍데기로 보일 뿐이다.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과 끈기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이 잘 팔리는지 안 팔리는지로 재능이 판가름되는 냉혹한 미술계에서 스트릭랜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재능을 알아봐주고 끝까지 곁에서 후원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들을 매정히 대했지만 그들은 그가 위대한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광기 하나로 고단한 생을 연명하던 스트릭랜드는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로, 마르세유에서 타히티로 예술의 여정을 이어간다. 타히티는 예술가들에게 순수함이 남아 있는 엘도라도와 같은 곳으로 타락한 도시를 떠나 절대적인 순수성을 누리기 위한 종착점이다.

 

역시 폴 고갱의 흔적을 색다른 관점으로 그린 로맹 가리의 단편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에도 등장하는 타히티는 비록 자본주의에 의해 순수함을 상실한 곳으로 그려졌지만 그럼에도 이 신비의 섬은 예술이라는 닿지 않는 관능의 세계에 문명으로 더럽혀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맞닿아 있는 곳이다. 스트릭랜드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훗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림과 자연과 사랑으로 가득한 생을 보낸다.

타히티에서 진짜 삶을 찾게 될 때까지 부랑자와 맞먹는 생활을 하던 스트릭랜드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배고픔과 멸시와 싸워야했지만 달을 추구하기 위해 뒤늦게 선택한 길에서 오는 궁핍과 수치를 담담히 맞아들였으며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그에게는 뚜렷한 미래가 있었다. 자신의 재능과 천재성에 대한 잔인할 정도로 냉혹한 신뢰가 있었고 그 신뢰는 시련을 별 것 아닌 일처럼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달래놓았던 내 안의 방랑벽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타히티라는 태평양 한가운데 초연히 자리 잡은 에메랄드빛 섬에서 자신의 진짜 고향을 찾은 고갱처럼 나만의 고향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 듯 사로잡혔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나 자신도 몰랐던 그 고향을 찾아, 낯선 곳이 주는 익숙함. 그 감흥을 느끼기를 고대한다. 내가 현재 속한 환경과 사회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매력적인 그 곳을 찾아 안착하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깨끗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유치하고도 순수한 기대가 있다. 어렵게 찾은 그 고향도 익숙해지고 더 이상 그 어떤 자극이나 색다른 매력도 느끼지 못할 때가 되면 또 다른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야 할지도 모르지만.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낙원이 될 수도 있고 다시는 현재의 안락함으로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종착지가 될 수도 있는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만큼 용감하지 못하고 열정적이지 않지만 그 환상으로 색칠된 낙원에서 고갱이 보았던 색채를 보고 말론 브란도가 느꼈던 사랑을 느끼고 스트릭랜드가 사로잡혔던 광적인 열정에 사로잡혀보고 싶다.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

스위스의 작가이자 문화 이론가인 드니 드 루즈몽Denis de Rougemont이 한 유명한 말이다. 내가 이상으로 여기는 달은 나에게 악마였다. 나는 달에게 집착했고 내 모든 걸 쏟아 부었으며 달 주변에 있는 별은 보지 못했다. 꿈을 위해서라면 내 주변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도 희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모습은 점점 더 나를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며 충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갔고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바에는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게 더 옳은 선택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달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그 존재는 우리에게 사랑이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자신의 유언과 같은 역작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남긴다. 그리고 그 몰인정하고 불쾌한 천재 화가 스트릭랜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그의 추종자 스트로브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참 매정해.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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