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inko Oct 03. 2020

떠도는 세계를 사는 예술가의 변명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by 가즈오 이시구로

한 사람이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 거기에 운까지 더해야 역사에 이름 한 줄이라도 남길 수 있는 지금, 과연 어떤 시대가 나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내 꿈과 재능을 위한 최적화된 환경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19세기 지식인들을 동경했다. 컴퓨터는커녕 휴대폰도 없이 기계가 대신 해주는 일들을 인간의 뇌가 최대치로 끌어올려 수행해 지식과 예술이 만개하던 시절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9세기, 문학계에서는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빅토르 위고가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쏟아냈고 철학에서는 헤겔, 니체, 프로이트, 융 등 철학을 모르더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철학자들이 활동했으며 음악계에서는 쇼팽, 바그너, 드뷔시, 리스트 등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위대한 음악가들이 그 이름을 빛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성이 앞으로 나서 전문 직업인으로 살기에는 편견이 아직 만연했기에 여성 지식인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못지않게 문화예술이 꽃피던 시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윗세대는 과거에 비해 지금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며 그들의 눈에 연약한 엄살쟁이일 뿐인 젊은 세대를 비판하고 젊은 세대는 옛날엔 이렇게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다며 공정한 기회를 당연한 일로 여기고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한 윗세대를 비판한다. 둘 다 옳은 말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살기 편한 시대가 맞다. 하지만 동시에 숨 돌릴 새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날고뛰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 집합체 안에서 본인이 무능력하고 쓸모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처량한 정신적, 물리적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모님을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그 다음엔 시대를 탓한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더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런 이상을 허락해주지 않은 시대를 원망하고 미워한다. 사실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탐탁지 않아한 사람들은 어느 때나 있었다. 겪어보지 못하면 미련이 남을 이 시대들을 다행히도 우리는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직접 겪기에는 두려움부터 앞서는 전쟁, 전염병, 혁명이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펼쳐진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는 19세기 뉴욕 상류사회를,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서는 러시아혁명 직후 지식인들의 삶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알제리에서 발발한 역병을 경험한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대표작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는 마스지 오노라는 은퇴한 노 화가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전후를 사는 예술가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체험할 수 있다. 전쟁을 전혀 겪어보지 못한 우리 세대가 전후 시대를 맞은 사람들이 겪었을 외적 변화 및 내적 동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전쟁은 사회의 기본적인 체계뿐 아니라 예술계에까지도 검은 손을 뻗쳐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 막대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인식이 성립된다. 


이 소설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이 축을 이루며 개인의 사유를 통해 한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되짚어가며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사건들을 확대한다. 소설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부유하는floating’, 즉 유동적인 세계, 곧 기억 너머로 사라질 떠도는 세계이다. 아무리 이 시대가 마음에 들지 않다한들 우리는 현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지만 현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마스지 오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시절, 순간적인 환락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순수 예술을 표방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정치 선동적인 그림을 그려 부와 명예를 얻는다. 전쟁은 패배로 끝나고 새롭게 떠오르는 다음 세대가 전쟁을 선동하고 움직였던 구세대를 첨예하게 비판하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때, 오노는 그동안 굳게 믿어오고 지켜왔던 가치관에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회상을 통해 본인의 과거를 찬찬히 돌아보며 자신의 행동이 낳은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 이 소설을 읽고 ‘사과가 없기 때문’에 매우 불쾌하다는 후기를 남겼다. 소설은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종의 암시를 주지 직접적으로 해답을 주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시구로는 오노의 자기 변호적 변명을 통해 ‘평범을 넘어 도약하기 위해’ 했던 선택들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격동과 허망함, 죄책감을 암시했지 실질적으로 사과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은 나타내지 않는다.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위해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로 애써 책임을 회피하고 다음 세대에 책임을 떠넘긴다. 그게 진짜 기성세대의 모습이고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다. 


명성을 누렸던 지난 시절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이 가졌던 신념을 뒷받침하는 자존심을 안고 살아가는 오노는 자녀 세대가 주도하는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에 불안하고 소외된 마음 역시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그는 사사건건 자신의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둘째 딸 노리코에게 항변하고자 본인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그럼에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하는 고민을 놓지 않는다. 이 모습만 봐도 사람이 타고난 시대에 따라 얼마나 유동적인지 알 수 있다.  오노에게 전후 사회인 1940년대는 최고의 시대였지만 오노의 자녀 세대에게 1940년대는 타파해야할 수치스러운 시대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 내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일까.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다른 선택과 다른 자세를 취했을까.


이 세상은 오노의 스승이었던 모리 선생이 말한 것처럼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것, 사람들이 부유하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 그가 그렸던 그림처럼 ’덧없고 꺼지기 쉬운 꿈같은 그 무엇‘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안한 부유하는 세상이다. 그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소모되는 예술가, 정치인, 자영업자, 가정주부 등 사회의 일원 하나하나가 이룬 성취는 그 다음 시대가 찾아왔을 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다. 어떤 예술가는 지금 이 시대를 점령한 전염병을 이용해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어떤 예술가는 특정 정치 세력에 편승해 깨어있는 예술가라는 평판과 함께 신분상승을 노릴 수도 있다. 그들이 다가오는 다음 시대에 어떻게 대처하고, 그 시대에서 어떤 평을 얻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잠시 존재하다 사라질, 지금 우리가 몸 바쳐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세계를 진정으로 향유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오늘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세계가 주는 온갖 즐거움과 이야기, 소란과 흥분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이다. 어차피 덧없이 사라질 꿈같은 그 무엇을 붙잡고 매달려봤자 곧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준비하지도 못한 다음 세계가 우리를 덮치고 우리는 또 익숙했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저 잘못된 신념이 아닌 올바른 신념을 갖고, 믿는 바를 위해 행동하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렇게 할 때 떠도는 세계를 사는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계의 아름다움, 그것의 진짜 유효성을 의심하는 한 그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향유하기란 어렵다네.

칙칙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계에도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의심하지 않고, 진정으로 향유할 때에만 그 아름다움이 주는 찬란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세계, 이 시대가 비록 달갑지 않다한들 즐기고 향유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전 01화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