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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08. 2020

불행의 실버라이닝

<쟈디그 또는 운명> by 볼테르

영어로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는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괴로움이 있으면 즐거움도 있다’ 등으로 사자성어 고진감래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직역하자면 모든 구름 뒤에는 은빛 가장자리가 있다, 즉 ‘구름 뒤에 해가 숨어있다’라는 뜻이다. 


어릴 땐 고생이나 불행 뒤에 반드시 즐거움과 낙이 따른다고 굳게 믿었지만 단호한 현실을 살아가며 그 견해는 점차 빛을 바랬고 대신 새로운 견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반드시 즐거움과 낙이 따르진 않더라도 그토록 비극적인 단어인 ‘불행’조차 긍정적인 소산물을 낼 수 있다는 견해다. 

그 중 내가 가장 크게 사는 소산은 ‘공감’의 능력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공감을 표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특히 연애상담에 젬병인데 누군가 내게 이성친구 때문에 힘들다고 심각하게 호소해도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성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지만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힘들면 왜 계속 만남을 유지할까 하는 의문만 들 뿐이다. 내게 연애상담을 하는 사람은 시간낭비만 하게 된다. 

공감이라고 해서 꼭 감정이 동요되어 격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가끔은 유창하고 박식한 조언의 말보다 잠잠히 들어주는 귀가 필요하다. 불행을 겪어본 사람은 불행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인내심이 생기며 진실하고 신실한 위로자가 될 수 있다. 


불행의 실버라이닝 중 두 번째는 예술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그림 한 점을 봐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 그림이 갖는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꽃을 확대해 그린 작품으로 유명한 미국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꽃의 화려함을 정교하게 잘 묘사한 실력 좋은 화가의 그림으로만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화려한 꽃잎 사이 가려진 그녀의 희생과 고독이 보일 것이다. 


불행의 경험은 관객 및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모든 것을 쏟아 창조해낸 문화예술을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작가의 입장에서는 깊은 차원의 예술을 창조해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많은 작가들은 견디기 힘든 삶을 창작을 통해 이어나갔고 고통을 작품으로 치유했다. 외로움과 고독에 침잠해본 적이 없다면 쇼팽의 음악을, 삶의 무의미함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면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들레르, 이상,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이 절망적이고 –본인들이 말하길- 저주받은 삶을 산 사람들은 오히려 그 불행을 장작삼아 창작에 불을 지폈고 고통에의 탐닉으로 지루한 인생에 불꽃을 피웠다. 이들에게 불행과 고통은 시시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장식하는 사치이자 향락이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한 불행의 실버라이닝이 생생하게 그려진 소설이 있다. 그 비상함과 재치, 다방면에 이르는 지식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볼테르Voltaire라는 프랑스 사상가의 소설 『쟈디그 또는 운명』이 그렇다. 볼테르는 소설가이자 역사가, 철학가로도 명성을 날렸고 특히 종교에 대한 대담하고 신랄한 비판으로 유명했다. 볼테르의 작품은 결코 약 300년 전인 18세기에 쓰인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유머를 뽐낸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낙천적이게 비극을 그리고 기막히게 정곡을 찌른다. 그의 글에서는 계급사회와 인간사 자체를 향한 회의주의와 비판이 꿈틀대지만 또 그 여백 사이사이로 긍정과 희망이 아직 짓밟히지 않은 그 존재를 드러낸다. 


1747년 출간된 『쟈디그 또는 운명』은 에드거 앨런 포, 코난 도일 및 에밀 가보리오와 같은 추리소설의 대가들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그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자신의 불운을 추론하고 그 추론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주인공 쟈디그는 일련의 억울한 사건들을 연달아 겪지만 포기하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반면 운명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의 선이나마 태어나게 하지 않는 악은 없다

『쟈디그 또는 운명』의 주제다. 지혜롭고 관대하며 현명했던 청년 쟈디그는 자신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의 시기질투로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도망갈 처지에 놓이기도 모든 것이 몰수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묻는다. 유일한 사랑 왕비 아스타르테와는 기약도 없이 생이별을 하게 되고 살 길을 찾아 떠난 긴 여정 가운데 베푼 호의는 악으로 돌아온다. 쟈디그는 새로운 불운이 닥칠 때마다 그간 있었던 모든 불운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고 자신의 ‘학문과, 올바른 처신과, 용기가 오직 불운만 가져다준다’는 생각에 분노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쟈디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적극적인 자세로 모든 일을 대하고 앞장서서 위험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 


쟈디그의 여정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이 왕비 아스타르테의 부군을 뽑기 위한 마지막 단계인 지혜를 시험하는 수수께끼에서 드러난다. 쟈디그는 그동안 축적한 삶의 지혜로 현명하게 모든 수수께끼를 풀고 바빌론의 왕이 되어 그간 괴로움 가운데 만났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덕을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고 모든 일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늘을 찬양한다. 1차원적으로 쟈디그는 사랑을 얻었고 더 깊은 차원에서 쟈디그는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고 위로하며 신의 섭리를 따르는 지혜를 얻는다. 그의 불행이 가져다준 사랑과 지혜다. 


볼테르 역시 쟈디그와 평행하는 삶을 살았다. 작품 해설에서 역자가 볼테르를 ‘구원받을 가망이 있는 마귀 녀석’이라고 불렀듯 볼테르는 평생 종교 및 교회와 대립했고 그로 인해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지만 끝없이 ‘절대자’를 찾았고 신뢰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특히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쟈디그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도, 감사한 일을 겪을 때에도 습관처럼 절대자와 섭리를 떠올린다. 


16~17세기 유럽 사람들이 종교와 전쟁을 동일시하고 종교를 잔인하고 위선적이며 권위적인 집단으로 보는 견해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 사는 우리가 결코 비난할 수는 없다. 당시 로마 가톨릭과 예수회는 권력을 손에 쥐고 백성들을 지배하고 탄압했으며 그 세력을 정치에까지 뻗쳐나갔다. 이 시절 기독교와 가톨릭은 타락한 관습과 권위에 빠져 허우적대던 모습이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절대자인 신이 아닌 종교에 대항했다고 볼 수 있다. 볼테르는 무신론자가 아닌, 세상을 창조했지만 인간사에는 무심한 절대적인 선을 믿었던 이신론자였다. 누구보다 뛰어난 명철함과 재치를 갖고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신과 선을 갈구했지만 끝없이 탄압을 받았던 볼테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쟈디그와 같은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련이 없다는 것은 축복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인생의 진수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명언을 남겼다. 평탄한 인생에 일부러 시련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처럼 불운이나 불행에는 선명하지 않아도, 그 크기가 크지 않아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실버라이닝이 숨어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불행을 훨씬 더 어른스럽고 분별 있는 태도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불행을 나누어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을까. 


불운한 두 사람은, 여리고 작은 두 그루 나무처럼, 서로에게 의지하여 스스로를 강화하고 폭풍우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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