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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Aug 10. 2020

숲 속엔 영원한 청춘이 있다

<자연> by 랄프 왈도 에머슨

그 높다란 암벽 위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대지를 보았을 때,
드물게 찾아오지만 너무나 확실한 그 감동,
나 자신이 위대함의 면전에 있는 그 느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자연 앞에 겸손해지지 못하고 그 위대함 앞에 숙연해지지 않는 사람은 세상이 값없이 제공하는 아름다움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는 가엾은 사람이다. 이 자연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지 만물의 어머니라 하여 영어로 ‘대자연’을 ‘Mother Nature’라고 부른다. 자연은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완벽함 그 자체이다. 꽃 한 송이만 가까이 들여다봐도 그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릴 듯이 꽃잎을 따라 결을 만드는 세밀한 선, 꽃술을 조심스럽고도 포근하게 감싸는 곡선, 그 오묘한 색깔은 부족한 단어의 향연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신비를 온전히 머금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 앞에서 어떤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단지 그 자연 앞에 마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 특혜를 박탈해가는 현대시대가 주는 불이익일뿐.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자연을 마주하는 혜택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햇빛마저 침투할 공간 없이 빽빽하게 들어붙은 주택가 창 너머엔 비슷한 처지의 또 다른 창문이 시선 둘 곳 없어 이쪽을 마주보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천편일률적인 전망과 다르게 고요함 가운데에서도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하는 자연은 끝없는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나이가 들어 자연을 보고 설레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한 워즈워스의 시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곡선으로 굽어 하늘에 수놓아진 무지개를 볼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설레는지, 달 위를 투명하게 덮어 부드럽게 유영하는 구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수십 년에 걸쳐 온몸으로 받아들이고도, 몸의 관절은 삐걱대고 손등에는 주름이 자자해도, 여전히 그럴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할 수 있겠다. 


초록색이 귀한 시대이다. 초록빛은 잡다한 번민으로 빛 바랜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눈에게도 휴식을 준다. 회색이 침투하며 초록색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코앞의 이익밖에 볼 줄 모르는 인간들은 도시 뿐 아니라 교외지역, 시골에까지 침범해 초록색을 인위적으로 제거한다. 


숲의 힘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핀란드 헬싱키에 자리한 작은 식당에 관한 영화인 <카모메 식당>에서 핀란드 사람들의 여유로움을 좇아 무작정 핀란드로 온 일본 사람들이 묻는다. “왜 핀란드 사람들은 여유로울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핀란드 남자가 답한다. “숲이예요.”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런던의 햄스테드 히스 주변을 고급 주택가가 두르고 있는 이유, 서울에서는 서울숲을 둘러싼 성수동이 새로운 부촌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다. 인간은 돈을 주고서라도 자연 가까이에 살고자 한다. 안타까운 점은 자연을 곁에 두고 사는 삶의 터전은 운 좋은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역세권보다는 ‘숲세권’이 좋은 주거지임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훼손되지 않은 진짜 완전한 자연을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쓴다.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연은 그 본연의 순수함을 잃어간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수록 원시의 매력이 세속의 손때에 닳아 사라진다. 현수막과 경고문이 아름다운 풍경에 밥숟가락을 얹고 시선을 빼앗는다. 


그래서 자연이 더 소중하다. 그리고 자연의 존재만으로도 생명을 느낄 수 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자연을 향한 신념과 믿음에 대한 에세이를 모아놓은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품은 우리를 감싸는 자연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감각과 혜안을 깨워준다.

우리에게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걸작을 매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이 주어졌다. 한 번만 고개를 돌려 시선을 자연의 색에 고정하면 그 특권을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다. 숲 속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함, 이성과 신앙을 되찾고 치유를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다. 


숲 속엔 영원한 청춘이 있다.

당장 현기증처럼 앞이 흐리고 캄캄해 그 누구도 만날 수 없고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숲 속에 가서 모든 짐을 벗어놓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영원한 청춘을 느낄 수 있다. 숲은 우리에게 젊음을 가져와줄 것이다. 사람은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간다. 태어난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우리를 품어준 대지로 돌아간다. 

자연을 볼 수 있는 어른들은 매우 적다’고 한 그의 말처럼 관심을 집중시키는 화려한 자태의 자연이 아닌, 일상에서 마주치는, 우리의 삶 전체를 에워싸는 자연을 볼 수 있는 어른은 많지 않다. 매년 봄, 만개한 벚꽃을 보며 자연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꽃잎 하나에도 감격하는 그런 사람은 분명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다. 


하늘은 그 가치를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 드리울 때는 장대함이 줄어든다.

그런 이들에게 나무는 덜 푸르고 열매는 덜 무르익었으며 꽃향기는 덜 자극적이다. 영원의 세계로 뻗어있는 하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덮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하늘이 가진 무한하고 성스러운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은 광활한 자연 앞에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에머슨은 자연을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로도 본다. 자연이 영구히 일하며 베푸는 손길은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인간을 양육’한다. 자연의 자비가 없었다면 인간은 결코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예술을 발견한다. 


유용한 예술이란 바로 그 자연의 혜택들을 인간의 재치로 재생산하거나 새로이 조합한 것들이다.


자연을 보며 하는 사색도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예술의 시작점이 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라벨은 물이 노니는 모습을 보고 ‘물의 유희Jeux d’eau’를 썼고 드뷔시는 ‘달빛Claire de Lune’을 노래했다. 자연을 모방함에 있어 건축 분야 역시 음악이나 미술에 뒤처지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유명한 아트센터 에스플라나드Esplanade는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과일 두리안을 본 따 만들어졌고 고대 그리스 신전의 코린트 양식 기둥은 아칸서스라는 식물의 톱니 모양 잎을 모사해 조각되었다. 이름마저 오이 피클Gherkin인 런던의 거킨 빌딩은 외형만 봐도 거대한 피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이라는 증류기를 통과한 또 다른 자연이다.

예술가들은 자연을 자신들의 세계로 불러들이고 재창조함으로써 희열을 느낀다. 평범하던 자연이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눈을 통하고 나면 예술이 된다. 똑같은 별을 보고도 누군가에게는 하늘이 맑아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내민 별 하나로 보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생텍쥐페리의 눈에 그랬던 것처럼 ‘초자연적인 빛, 마왕 같은 별, 위험한 초대’로 보일 수도 있다.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우리가 '자연의 모든 것을 모조리 찾아낸다 해도 호기심을 잃지 않게 해줄 것'이다.


인간을 계몽하고 자극하며 영감의 샘을 제공하는 자연 앞에 무릎이 연약해지고 눈이 어두워지는 그 날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함 속에서 기적을 볼 때 인간은 가장 지혜롭다. 


지혜의 변하지 않는 특징은 평범함 속에서 기적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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