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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Aug 23. 2020

고통만 더해 가는 삶이라도

<프랑켄슈타인> by 메리 셸리

건강하게 해소된다면 생산적인 결과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신이 되어 몸과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괴물로 빚어질 수 있는 것이 ‘욕망’이다. 모두 각자만의 욕망을 안고 살아가지만 욕망의 모습은 모호하기만 하다. 


스페인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의 1977년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우리가 집착하고 매달리는 욕망이 얼마나 애매모호하고 실체 없는 존재인지 유머와 조소를 섞어 알려준다. 중년 남성 마티유는 아내와 사별 후 하녀인 콘치타에게 집착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에 빠져든다. 콘치타는 마티유에게 마음과 몸을 줄 듯 말 듯 수개월에 걸쳐 그를 농락하고 마티유는 그런 콘치타에게 환멸을 느끼고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다시 그녀를 찾게 되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된다.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며 2인이 콘치타 역을 연기하는데 캐스팅 문제 때문에 우연히 그런 구도가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마티유가 갈망하는 대상은 콘치타라는 사람 자체가 아닌 그저 그의 욕망이라는 애매한 대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를 훌륭히 해낸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둘의 줄다리기가 계속 되다가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영화의 엔딩은 너무 허망해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이미 영화와 드라마로도 몇 차례 만들어져 우리에게 익숙한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 역시 인간 욕망의 허무함과 위험성을 말한다. 

북극해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선원들을 모집해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항해를 계속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을 만나기 원하던 로버트 월턴은 북극을 향하던 중 잠시 정박했던 아르한겔스크에서 비운의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괴물을 창조한 학자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다- 사람이 전혀 있을법하지 않은, 아니 있으면 안 될 지역에서 맞닥뜨린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남자의 등장으로 월턴과 선원들은 매우 놀라고 미지의 남자에게 큰 호기심과 연민을 품는다. 추위와 탈진으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있던 프랑켄슈타인은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자신의 절망적인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복한 집안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프랑켄슈타인은 어릴 적부터 자연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 들어가서 훨씬 더 실재적이고 진보적인 현대 화학을 접하게 된다. 존경하는 발트만 교수의 지도와 잠을 잊은 노력으로 학교의 수재로 인정받게 되고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주제였던 생명 원리의 영역까지 넘보게 된다. 생명이 가진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을 알아야했고 그는 시체안치소에서 해부학 및 시체가 부패되는 과정 등 혼자 감당하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벅찬 연구에 밤낮 매달린다. 죽은 몸뚱이에 생명을 부여하는 창조주에 대항하는 엄청난 실험을 감행하게 되면서 그의 정신 상태는 점점 더 피폐해져갔고 중간 중간 실험을 그만둬야한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욕망과 열정이 윤리를 지배했고 이미 멈출 수 없는 단계까지 와버렸다. 

죽은 물체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에 대해 프랑켄슈타인은 ‘위대하고도 압도적인 발견이었던지라, 내가 그 발견을 향해 차근차근 다가갔던 흔적은 죄다 없어지고 결론만 눈에 보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학의 힘으로 얼기설기 이어붙인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그로테스크하고 추악한 외형에 충격 받은 프랑켄슈타인은 갓 태어난 괴물을 두고 줄행랑을 친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홀로 남겨진 괴물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는지, 그 무엇 하나도 알지 못한 채 혼자 덜컥 생을 시작한다.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닌 끝에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추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괴물은 인간들의 혐오와 천대, 폭력에 맞서 말과 글을 깨침과 동시에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성을 배운다. 혼자만 다른 모습으로 창조된 그는 월턴 선장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나눌 벗이 필요했다. 어차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야할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순응하기로 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담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이브가 주어졌던 것처럼, 벌거벗고 있어도 수치를 느끼지 못했던 그들처럼,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했지만 서로의 추악한 모습을 보아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을 동반자가 필요했다. 


그는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를 찾아간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자신과 똑같은 종류의 여인을 창조해달라고 부탁한다. 괴물이 떠나기만 한다면 무엇을 못하겠냐만 여성을 창조하려던 시도 끝에 괴물과 똑같은 존재가 태어나 번식을 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요청에 시작했던 실험을 중단한다. 자신의 여인이 실험 테이블 위에서 갈가리 찢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괴물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둘의 입장과 상황이 바뀐다. 프랑켄슈타인을 지배하던 욕망은 이제 괴물을 지배했다. 욕망은 서식지를 옮겨 괴물 안에서 번식하며 그가 처한 불리한 환경과 연약한 속성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한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통해 외롭고 처절한 인간의 삶을 그려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창조자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내던져지듯 태어나 그 길고 험난한 여정을 혼자 헤쳐 나가야한다는 사실은 무섭고도 두려운 일이다. 


셸리 역시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다.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페미니즘 저서로 잘 알려진 여권신장론자였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정치 사상가 고드윈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는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새엄마와 살면서 가까웠던 아버지와도 멀어지게 된다. 외로웠던 열여섯 메리 곁에 훗날 남편이 될 퍼시 셸리가 나타났지만 별거중인 유부남이었던 퍼시 셸리와의 결혼을 메리의 아버지는 반대하고 연인은 메리의 의붓 자매 클레어와 함께 프랑스로 도피한다. 불륜으로 맺어진 도피한 연인이라는 낙인으로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고 첫째 딸의 죽음을 겪은 후, 이들은 스위스 제네바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로드 바이런을 만나기 위한 여행길에 오른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바이런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유령 이야기를 하나씩 쓰자고 제안하고 메리는 이 때부터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후 두 자녀를 더 잃는 슬픔을 겪고 남편 퍼시와도 관계가 소원해진 메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하는 데에 매진한다. 하지만 여성이었기 때문에 고딕소설을 출판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당시 문학계에서 권위가 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1818년, 만 19세의 나이에 이 걸작을 탄생시킨다. 소설이 문단의 칭송을 받으며 퍼시와의 관계도 회복되지만 그 행복도 오래 가지 않아 퍼시는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타고 있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익사한다. 세상에 다시 한 번 홀로 남겨진 메리는 자신이 펜으로 창조한 괴물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는, 열정에 불타오르는 월턴을 꾸짖으며 ‘악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행복은 가만히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적절한 휴식과 보상을 병행하며 주어진 일에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최선을 다하되 그릇이 넘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중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지금 내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이루고자 하는 욕망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았을 때 ‘각고의 노력 끝에 빚어낸 끔찍한 존재’로 완성되어 가고 있을 수 있다.  


평온 속에서 행복을 구하고 야망을 멀리하길 바란다.

프랑켄슈타인이 월튼 선장에게 남긴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와 절망으로 얼룩진 비극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참극이 참회와 용서, 그리고 화해의 길로 이어지는 과정 역시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애가 살아있음을 외친다. 자신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넣은 괴물도 처음부터 그렇게 잔인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 역시 ‘애초에 사랑하도록, 공감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였지만 단지 외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을 거부하고 혐오하는 사람들로부터 연이은 멸시와 경멸을 당하며 점차 폭력적이고 악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에 또한 고통스러워했다. 이렇게 철저히 혼자였던, 삶이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던 괴물도 살고자하는 소망이 있었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할 미래를 꿈꿨다.  

프랑켄슈타인에게 동반자가 될 여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괴물의 말에서 그가 갖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이 느껴진다. 


삶은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비록 고통만 더해 가는 삶이라도, 저는 이 삶을 살아 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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