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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Sep 24. 2020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

<인간 실격> by 다자이 오사무

뛰어난 지성과 재능을 가진 지식인과 예술인들에게선 자기파멸적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는 유명한 알코올중독자였고 미국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의 천재적인 작품 못지않게 연이은 자살 시도로도 유명했다.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그 유명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실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 말을 입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내면과 외면을 파멸로 이끌어갈수록 예술 혼은 더 뜨거워졌고 말 그대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타락시킨 이들에게 평범한 사람 이상의 나르시시즘이 있다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사실이다. 그 나르시시즘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작품을 향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그 자체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자신을 혐오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인 『인간 실격』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나르시시즘을 얘기하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도취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혐오할 이유도 없다.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기의 모습을 보는 일은 매우 괴롭고 고통스럽다.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하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있지만 과도한 자기 사랑은 더 훌륭하고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할 수도 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할 경우 찾아오는 처절한 패배감은 우리를 통증과 불행에 더 집중하게 하고 그 안으로 침잠함으로 자기 자신을 벌하는 동시에 몸과 정신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의 쾌감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고통으로 고통을 지우는 과정이 반복된다. 

부족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가 참 어렵다. 패배자의 눈물은 가끔 찾아오는 승리의 기쁨마저 흐리게 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은 가면의 생에 의해 희생된다.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실격』은 요조라는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에게 인간 실격이라는 선고를 내리게 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간다. 주인공 요조는 어릴 때부터 항상 익살스러운 표정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웃게 하는 익살꾼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이를 점차 자신의 무기이자 가면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런 익살 뒤에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혼자 전차를 타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숨어있다. 누군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간파할까 항상 두려움에 사로잡혀있고 마치 자신이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인에게 모질게 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조의 본모습은 전혀 모른 채 그가 만들어낸 매력적인 허상을 요조라고 믿고 그의 연극에 맞장구치며 그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의 행동을 보면 동정심을 일으켜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을 방어하기위해 취하는 극단적인 행동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준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기 전에 그들을 버림으로 그들에게 상처주고 본인에게도 상처를 남기며 독한 술로 정신을 넘어 육체까지 파멸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요조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행을 야기하는 행동들을 반복해 소설 속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친다. 이런 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요조 안에서 우리는 인간 다자이 오사무를 볼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요조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를 던지고 있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그가 그들과 상생하기 위해 내미는 마지막 손길이다. 인간은 원하지 않아도 매일 타인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평생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공포와 고난이 될 수도 있다. 요조에게 이 세상 인간들의 ‘삶’은 지옥에서 신음하는 것과 같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였다. 


모든 인간은 파헤쳐보면 추악함과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질투와 욕심, 잘못된 열정과 자기기만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 인간이다. 요조가 인간에게 그토록 공포와 욕지기를 느꼈던 건 아마 우리가 원래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내 힘과 노력만으로는 그런 타인을 조건 없이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때 저항을 멈추고 우리는 모두 동일한 특성으로 창조된 먼지 같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하고 전지한 존재의 자비를 구할 수 있다. 


이런 인정과 참회의 과정이 없었다면 나 역시 다자이 오사무처럼 인간 내면에 고여 있는 보이지 않는 괴담이 두려워 외면을 포장하고 인간들로부터 숨어버렸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무서워 가끔 숨어버릴 때가 있다. 얼마 전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나라는 사람을 묘사하기엔 너무도 과분한 칭찬이었다. 갑자기 어리석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남들 눈에 그렇게 비쳤다는 게 마치 내가 나라는 사람을 거짓과 가식으로 포장한 채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감사가 공포로 바뀌었고 종일 마음이 불편한 채로 하루를 보냈다. 그런 불안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사람들이 날 그렇게 보았다면 설령 내가 진심이 담긴 선한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나라는 사람의 일부이고 그런 일부가 있다면 다른 일부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런 각 부분들이 내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였다. 다행히도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기 전, 그런 모순을 견디지 못해 고민하는 내 모습이 순수하게 느껴져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아버지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꾸며내기 시작한 익살스러운 표정을 성인이 되어서도 난처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꺼내드는 주인공 마츠코에게서 요조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럽다’는 인상적인 감상평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 실격』이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현실성 없이 말도 안 되게 짜 맞춘 낙오자, 패배자들끼리의 드라마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실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우리 안에도 존재한다. 요조와 마츠코의 차이점은 요조는 의도적으로 삶을 등지려했지만 마츠코는 자신에게 등진 삶을 어떻게든 이겨나가려 삶을 붙잡았고 사람의 선함에 끝까지 매달렸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자기최면을 걸어 과거에 비해 달라진 시각으로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차피 계속 가도 똑같을 길,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를 쓰며 걸어가는 건지 자문하곤 한다. 요조처럼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두렵고 세상에 발을 내딛는 게 공포로 다가올 때 역시 많다. 이런 감정의 폭풍 속에서 우리가 자기혐오 대신 의탁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자기 부인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낮고 비참한 존재인지 인정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사전은 자기 부인을 ‘자기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즉,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혈기왕성하게 살아있는 나를 어떻게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건지. 하지만 삶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과하게 선명해진 나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이 자기혐오가 시작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나를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여기고 주연만이 가진 특권과 주목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여길 때 겸손하지만 당당하고 내가 아닌 것 같지만 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가장 유명한 소설의 첫 구절로 항상 손꼽히는 『인간 실격』의 첫 문장이다. 우리는 모두 부끄럼 많은 생을 살았다. 본인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삶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불행한 건 아니다. 

요조는 큰 슬픔이 뒤따를지도 모르는 ‘거칠고 큰 기쁨’을 미리 피하기 위해 숨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기쁨이 찾아오면 슬픔이 찾아올 가능성도 크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거칠고 큰 슬픔을 과거에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다면 자연히 큰 기쁨 역시 뒤따라오리라는 말이 된다. 


인간의 고뇌를 솔직하고 유려하게 풀어낸 이 명작을 남긴 다자이 오사무는 비록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자신을 그렇게도 괴롭히던 목숨을 스스로 끊었지만 우리는 이 하찮은 목숨 뒤에 있는 더 찬란하고 위대한 무언가를 희망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어렵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할 시간에 자신을 비하하고 괴롭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이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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