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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17. 2020

빈둥거려야만 행복하다면 빈둥거려라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by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빈둥거려야만 행복한 사람이라면 빈둥거리며 지내야 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원칙이다.

정말 파격적인 원칙이다. 이 잔인한 세상에서 빈둥거려도 된다고 말해주니 위로가 되기까지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보물섬』 등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게으름을 변명하고자 나섰다. 앞서 단편 『바보 이반』을 통해 소개한 ‘땀 흘린 만큼 먹으라’는 톨스토이의 주장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주장이다. 

이런 대문호들의 확고한 입장과 달리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한다. 부지런함이 주는 성취감에 흥분하고 게으름이 주는 달콤함에 녹아내리며 열정이 샘물처럼 샘솟다가도 한 순간 무기력의 늪에 빠진다. 열심히 달려도, 가만히 있어도 불안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노선을 취해 살아가야 할까.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을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 잭이 넋을 잃은 채 타자기로 끝도 없이 쳐놓은 이 속담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따분한 아이가 된다’는 말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즐거움도 필요함을 뜻하는 말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수 개월간 아무도 없는 호텔에 머물던 잭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지만 소설을 써야한다는 압박감과 어떤 외부 자극도 없는 폐쇄된 환경 안에서 잭은 정말 ‘따분한’, 그리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스티븐슨의 말을 빌리면 일만 하고 놀지 않는 이들의 영혼은 더 작아지고 좁아진다. 결국 일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사람은 그만큼 가족 및 친구 등 다른 것을 희생해야하기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고통을 미친다. 매일 시간에 쫓겨 휴식 시간까지 반납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귀에 잔인하게도 스티븐슨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하다고 말한다. ‘1000명이 쓰러지더라도, 그 틈을 메울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일을 멈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티븐슨은 ‘더할 나위 없이 부지런한 친구’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조급함의 씨앗을 뿌리고 소화 불량을 거둬 들인다. 그는 이득을 얻으려고 엄청난 일을 벌이고, 그 대가로 심각한 신경 착란증을 얻는다. 그는 온갖 교제를 끊고 다락방에서 모직 슬리퍼를 신고 납빛 잉크병을 놓고 은둔자처럼 살아간다. 일을 재개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온 신경계가 수축된 채 재빨리 씁쓸하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성질을 부린다.


20대 중반~30대 초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잠시 뜨끔했다. 그렇게 밥을 좋아하면서도 밥 먹는 시간까지 반납해가며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도맡아하고 매일 새로운 일을 벌였던 그 시절, 일을 얻고 사람을 잃었다. 경력을 얻고 여가를 잃었다.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청춘이라 생각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아 위에 언급된 부지런한 친구처럼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성질을 부렸다. 내 예민함에 가족들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 정도였다. 


아마 스티븐슨은 현재와 같은 무한경쟁사회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우리 개개인이 가진 능력이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한다. 지치고 닳아버린 우리의 내면에 양분을 주는 시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되 동시에 열심히 쉬는 사람이 되기를 장려한다. 

스티븐슨이 변명한 ‘게으른 자’는 밖에 나가서 자연을 감상하기도 하고 밤에는 술과 유흥을 즐길 줄도 알며 척박한 환경에 직접 부딪치며 모험을 하는 사람이다. 책상 앞에만 앉아 종이로 세상을 배운 사람들은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몸소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세상에 호되게 당하게도 해줄 기회인 게으름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것처럼 일해도 세상은 우리를 알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때 찾아오는 박탈감을 극복하기에 우리는 너무 연약하다. 우리가 보잘 것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너무 대단찮아서’라고 말한 스티븐슨의 말처럼 우리는 대단할지언정 세상이 대단찮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번 더 위로를 받는다. 우리라는 사람을 모두 품기에 세상이 넉넉지 못해서, 우리 모두의 꿈을 이뤄주기에 세상이 너무 좁아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덕목으로 스티븐슨은 ‘욕망과 호기심’을 건넨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삶을 이어나갈 이유가 생기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신기하고 재미있고 궁금한 곳이 된다. 어린아이처럼 그 세상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오른다.


욕망과 호기심이라는 두 눈을 통해 가장 매혹적인 색깔로 칠해진 세상을 바라본다.

욕망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다르다.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욕구인 욕망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맡은 일을 대한다면 상황 때문에, 목표 때문에 전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리던 사람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바라볼 때 세상은 매혹적으로 색칠되어 있다. 

우리가 게을러져야하는 부분은 ‘성취와 결과’다. 오르지 못할 산을 매일 다시 오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성취와 결과보다 중요한 어떤 걸 찾기란 와인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포도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만큼 지루하고 어렵다. 와인이 다른 값싼 술보다 좋은 이유는 한 모금 한 모금 안에 들어있는 포도가 가진 이야기 때문이다. 


정상에 올라 느끼는 기쁨도 크지만 그보다 산에 오르는 길에 맡는 나무의 냄새, 발에 닿는 흙의 감촉, 간간히 들려오는 동물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면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지라도 내려오는 길이 풍성하고 충만할 수 있다. 정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 하산의 길은 내일 다시 정복할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자 장애물일 뿐이다.  

이 교훈을 깨달았을 때 톨스토이의 주장에 부합하는,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의 교집합을 찾을 수 있다.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이제 숨을 돌리고 기다려준 사람들을 챙기고 진짜 삶을 즐길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이미 눈은 침침해지고 무릎은 삐걱대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남녀가 무엇보다도 갈고닦아야 할 자질은 용기와 지성이다. 인생에서 우리의 불안정한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 지성의 시작이고 그 사실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것이 용기의 시작이다. 너무 근심스럽게 앞날을 보지 않고, 과거에 대한 감상적 후회에 빠져 미적거리지 않으며, 정직하면서도 약간 저돌적인 태도는 이 세상을 살아갈 준비가 잘된 사람의 특징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준비가 잘 된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은 미래를 멀리 내다보기보다는 바로 앞에 놓인 것들을 주시하며 욕망과 호기심으로, 용기와 지성을 갖고 정직하면서 저돌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갈 태세를 갖추고 싶다. 흔들거리는 돌다리를 밟고 강 건너편으로 나아가는 하루하루지만 무거운 몸으로 헐떡이는 나를 위해 당분간은 내 몸이 빈둥거려도 눈감아줘야겠다. 


여러분은 자신이 받은 축복을 알지 못한다.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것은 도착하는 것보다 낫다. 진정한 성공은 힘겨운 노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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