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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08. 2020

땀을 흘린 자, 빵을 먹으리라

<바보 이반> by 톨스토이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장 19절)


뱀의 간교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선악과를 제외한 에덴동산의 모든 풍성한 먹을거리가 주어진 아담과 이브였지만 금기된 것을 향한 욕망과 뱀의 달콤한 유혹은 이브의 눈을 멀게 만들어 급기야 남편인 아담까지 죄의 길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벌로 인간은 값없이 풍족하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던 시절을 지나 얼굴에 땀을 흘려야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


일한 대가로 돈이 주어지는 노동은 그 기원처럼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복이기도 하다. 죽기 전까지 매일 꼬박꼬박 나를 찾아올 하루를 ‘잘’ 살기 위해 ‘노동’은 필수 요소다. 하지만 아침에 직장에 갈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밀려오고 해야 할 일 때문에 매일 번민과 피로에 시달린다면 결코 잘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윤택하게 해주기도 하는 직업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값지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직업’은 대부분 영어로 ‘job’이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많이 쓰기도 하지만 더 전문적인 용어로는 ‘vocation’이라고 한다. 사전은 ‘Vocation’을 ‘천직’ 또는 ‘소명’으로 정의한다. 이는 흔히 쓰는 ‘일자리’, ‘직업’과는 차원이 다른 단어로 나를 위해, 나에게만 주어진 자리이자 召(부를 소), 命(목숨 명)자가 시사하듯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나에게 맡겨진 일과 직업이 오직 나만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통해 어떤 훌륭하고 멋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단지 금전적인 보수를 바라며 그 날 그 날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나갔던 시절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나를 부러워하고 내가 하는 일에 동경하는 눈길을 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 물론 나도 내가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 하지만 가끔은 일정한 월급을 받는 회사원들이 극도로 부러울 때가 있다. 좋은 기회를 준다는 빌미로 뉴스에서만 보던 ‘열정 페이’를 받은 적도 많고 회사가 망했다는 이유로 몇 달간 일한 급여를 떼여보기도 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못 받거나 일이 차례로 끊겨 궁핍함을 경험해보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따라서, 존엄 있는 삶을 영위하기위한 요소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노동을 어떻게 하면 더 품위 있고 멋있게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부지런해지기는 어렵지만 나태해지기는 어찌나 쉬운지 게으른 하루를 보낸 날은 잠들기 전 괜히 자신을 꾸짖어보다가 또 합리화하며 칭찬과 자기비하를 반복하다 잠이 든다. 현재 하고 있는 일, 앞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정말 사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모순적이게도 지난 몇 달 간 '아무것도 안하고 살고 싶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혼자 지속해나가는 자신과의, 또 삶과의 싸움에서 많이 지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손을 놓고 아무 것도 안하며 –심지어 책도 읽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며- 수개월을 보냈는데 그 지루함과 열등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짓눌렀다. 그 때, 보수의 많고 적음을 불문한 노동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만약 나의 무의식적인 소원이 실제 이루어져 아무것도 안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면 나는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그 말을 후회할 것이 뻔하다. 아무것도 안하고, 일도 안하고 돈도 벌지 않고 산다고 결코 지금보다 더 평안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사람은 본래 일을 해서 땀을 흘린 대가로 먹고 살도록 지어졌다. 고된 노동 후에 먹는 밥이 더 맛있듯 인간은 노동, 특히 육체적 노동을 한 후에 어떤 종류의 쾌감을 느낀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의 단편 『바보 이반』은 손을 부지런히 놀려 먹을 식량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고결한 행위인지를 일깨워준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쓴 톨스토이가 썼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전래동화 형식을 띄는 작품으로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준다. 


이반은 부자 농부의 삼형제 중 막내로 제목에서 보여주듯 바보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난 군인인 첫째 형과 상인인 둘째 형을 대신해 집에 남아 열심히 농사일을 하며 가족들을 챙긴다. 형들은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이 부족하자 아버지에게 자신들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해 각각 자기 몫을 챙겨 다시 떠났고 이반은 역시나 집에 남아 묵묵히 농사를 짓고 부모님을 모신다. 재산을 나누면서도 착한 이반 때문에 아무런 불화 없이 일이 마무리되자 이를 본 도깨비는 자신의 천성대로 불화를 일으키려 계략을 짠다. -우리나라 책에서 도깨비로 번역된 이 단어는 톨스토이의 러시아어 원작에서는 어떤 단어가 쓰였는지 모르지만 영어 번역본에서는 ‘Old devil’, 즉 ‘악마’로 번역되었다. 도깨비보다는 악마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이들이 많이 읽는 동화이기도 하고 한국 전래동화 느낌을 살리기 위한 의도의 의역으로 보인다.


도깨비의 교묘한 술수에도 바보 이반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또는 환경이 어떻든 전혀 개의치 않고 바보처럼 일만 한다. 아무 반응 없는 이반으로 인해 역으로 도깨비들의 애간장이 탄다.  이반은 돈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명예, 권력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큰 도깨비는 작은 도깨비들을 시켜 바보 이반과 형들을 이간질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지만 이반은 그런 계략에 아예 무관심하기에 오히려 주어진 일을 꿋꿋이, 더 열심히 해나간다. 가끔 우리는 너무 아는 게 많기에 오히려 덫에 걸려 들어갈 때가 있다. 이반이 욕심 부리지 않고 묵묵히 일하기만 할 때, 도깨비들은 도저히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도깨비들은 그런 이반의 고집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떠난다. 

작은 도깨비들에게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우두머리 큰 도깨비가 직접 나선다. 이반의 도움으로 세 형제는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있었고 큰 도깨비는 이를 보고 크게 약이 오른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무너뜨리고자 새로운 전략을 시행한다. 두 형은 역시나 큰 도깨비가 계획했던 대로 나라를 빼앗기고 배까지 곯는 상황에 처한다. 


이번엔 직접 나서 이반을 넘어뜨리려 그의 나라에 쳐들어와 전쟁을 선포한다. 하지만 백성 중 그 누구도 싸우길 원하지 않아 전쟁이 불가능했고 물건을 약탈하여도 그 누구하나 저항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주었기에 약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외려 도움을 받는 꼴이 된다. 세상사에 대한 무지는 독이 되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문제, 주변 사람들의 판단이나 시선 등에 대한 무지는 힘이 될 수 있다. 

돈으로 식량 등을 거래하려고 해도 적정량 이상의 돈은 필요 없다며 돈을 거부하는 백성들로 큰 도깨비는 먹고 마실 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관대한 이반의 배려로 그의 두 형과 큰 도깨비는 이반의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되는데 한 가지 조건이 ‘일을 해야 한다’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남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이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았던 도깨비는 손으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호언장담하지만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종말을 맞이한다. 


도깨비의 말처럼 손으로 일하지 않아도 돈이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지. 쉽고 가벼운 노동에 비해 막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그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허황되게 이룬 성취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 스탕달은 소설 『적과 흑』의 밑바탕이 된 치정사건을 언급하며 당시 소시민 계급 청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상류계급으로부터 요구되는 여러 가지 하찮은 의리에는 얽매이지 않으며, 인생을 메마르게 만드는 상류계급 특유의 견해나 느낌에 물들지 않아도 되고 사물을 강하게 느끼므로 의지의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아마도 지금부터 위대한 인물은 모두 이들이 속해 있는 계급에서 나타날 것이다. 


사물을 강하게 느낀다는 부분이 유독 마음에 와 닿는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읽다보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례허식이 넘쳐난다.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수치로 여겨졌던 파리 상류사회에서는 무도회에 어떤 색의 드레스를 입고 갔는지에 따라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손님을 맞는 살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치장하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 그들은 사물을 강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 사물은 추상적이고 조금 덜 본질적인 의식의 소품으로밖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을 하는 계급에게 사물은 삶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눈이다. 미물로부터도 교훈을 얻고 작은 것에서도 생명을 느끼는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단지 지나가 버리는 무의미한 배경으로만 보는 사람들보다 더 의지적이고 더 강하다. 스탕달의 말은 어떻게 보면 뛰어난 지적능력을 갖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해야만 하는 소시민 계급 청년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하는 환경에 내몰림으로써 사사로운 일에 엮이지 않고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는 긍정적인 면은 부정할 수 없다. 

노동의 중요성은 기타 다른 소설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앞서 소개한 프랑스 작가 볼테르의 소설 『깡디드 또는 낙천주의』에서 삶은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가르침을 붙들고 살아가려 하지만 계속해서 닥치는 불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끝없이 고민하던 깡디드에게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노인은 '노동이 우리들로부터 세 가지 악을 물리쳐 줍니다. 그것은 권태와 못된 버릇과 가난입니다.'라고 말해준다. 그 끈질긴 시련을 모두 겪었음에도 깡디드와 그의 동반자들은 모든 것을 잃다시피하고 초라해 보이는 결말에 이르지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일합시다. 그것이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오.’라는 결론을 내린다.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도 열네살 꼬마 모모는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라고 말한다. 일하지 않으면 감상에 젖어 공상에 빠지게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굳이 모두 꺼내 들여다보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감상적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는 사랑에 모든 정열을 바치고 사랑하는 여인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때때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루의 목적과 그에 따른 의무감 그리고 희망을 가질 테니까’라는 말과 함께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한 부러움을 내비친다. 베르테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었다면 사랑에 그렇게까지 온몸을 내던지지 않았을 테고 그만큼 그가 받은 고통의 양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 명작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을 테지만. 


살기 위해 애써 흘린 땀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로 인해 내 소중한 가족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내가 의지의 힘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어디에 있을까. 땀을 흘리고 먹은 빵이 공짜로 떠먹여진 케익보다 더 달콤한 이유다. 인간들과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한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주요하고 고집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고역일 때가 많다. 육체적 노동 뿐 아니라 감정적, 정신적 노동도 제공해야 하며 수십 년을 다른 환경에서 자란,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역시 감당해야한다. 일터에서 평정심과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쉴 새 없이 우는 갓난아기 옆에서 초연하게 독서를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과 직업은 주어졌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도 주어졌다.  


게으름과 나태함이라는 천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지금, 인간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사로운 악을 물리치기 위해, 일과 노동을 향한 톨스토이의 관점을 빌려 살고 싶다. 그리고 땀 흘려 일해 수확한 값진 결실을 맛보는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삶을 살고 싶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한 번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나의 소명을 떠올려본다. 


이반의 나라에는 딱 한 가지 관습이 있다. 손에 굳은살이 박인 사람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지만 굳은살이 없는 사람은 남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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