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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04. 2020

독서가 주는 유익한 단조로움

<행복의 정복> by 버트런드 러셀

가끔 아무런 목적 없이 서점을 둘러보곤 한다. 사방을 가득 채운 책장 안에 가지런히 자리 잡은 책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책이 나왔는지, 요즘 트렌드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즐겁다. 그 날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기분을 좀 달래주려 서점에 갔는데 외국어 서적을 모아둔 코너에서 “The Conquest of the Happiness(행복의 정복)”라는 거창한 제목을 가진 노란색 표지의 책이 눈에 띄었다. ‘행복’에 대해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얼른 손에 집어 들었다. 저자가 당대 최고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는 점도 책을 고르는 데 망설이지 않게 해준 큰 요인이다. 


행복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러셀의 견해 중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확실히 불행과 행복을 개념을 정의하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그 중 특히 내가 강력하게 동의한 ‘단조로움’ 대해 소개하고 싶다. 

러셀은 '유익한 단조로움fruitful monotony'이라 이름 붙인 이 주제에 대해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며 자극의 유해함과 단조로움의 유익함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우울과 무기력으로 끌고가는 권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견을 표한다.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은 젊은 사람들이 배워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 젊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나도 아직 젊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고요와 권태를 전혀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고요함 가운데 보내는 자신만의 시간이 두려워 왁자지껄하고 흥분되는 분위기 속에 자신을 끝없이 내보내야 한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자라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 환경이 큰 역할을 한다.   


러셀은 ‘수동적인 오락거리’를 과도하게 제공하는 현대의 부모들(거의 백년전에도 부모들은 똑같았다)을 비판하며 ‘어린아이는 주로 자신의 노력과 창조력에 의지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직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나지만 이 말에 극히 동의한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안겨주고 싶고 삶 속에서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니고 다양한 자극과 흥분을 주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이 우리를 데리고 이곳저곳 더 많이 다니지 않은 것이 아직까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끊임없는 자극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비슷한 감각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 산만하고 불만족스러운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식당이나 카페, 기차 안에서 아이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서는 태블릿 PC와 유튜브가 필수이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 때문에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노키즈존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통탄할 일이다.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며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아이들의 천성이지만 공공장소에서만큼은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화려하고 시끄럽지 않아도 집중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알려준다면 단어 자체부터 사라져야할 아동혐오가 사라지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아이들도 책읽기를 자발적으로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런 자극이 주어지지 않아도 책 한권만 있다면 시간가는 줄 모르는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놓치기에는 너무 큰 행복이기에 모두에게 누려볼 기회라도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 습관을 길러줄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 및 주변 어른들에게 있다. 어른들부터 책이 지루하다는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책을 권유할 수 없다. 본인은 책을 한 장도 읽지 않으면서 자녀에게는 위인전, 필독 도서, 더 나아가 영어로 된 원서 등을 강제로 읽게 하는 부모님들이 많다. 이는 오히려 책에 거부감을 느끼고 기피하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소지가 매우 크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책을 읽어도 빠른 전개와 선정적인 이야기가 있는 책을 편독하게 되어 위대하고 훌륭한 작품들을 놓치게 된다.


어린 식물은 계속 같은 토양에 가만히 놔둘 때에 가장 잘 자라는 법인데,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잦은 여행을 하고 지나치게 다양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좋지 않다. 


시끄럽고 현란한 환경이 아닌 고요한 환경에서 자녀와 부모가 집중해서 함께 책을 읽는다면 책에 대한 거부감, 더 나아가 책이 줄 수 있는 정보와 지식에 대한 거부감 역시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 온갖 잡음과 소음으로 뒤덮인 현대 도시에서 이런 환경은 너무 귀한 몸이 되었지만 가끔은 외부에서 하는 활동 대신 집에서 조용하게 즐기는 독서가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인지를 직접 체험해보았으면 한다.


단조로움이 주는 유익함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효과적이다. 집단주의 성향의 나라인 한국에서 고요를 즐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권장되지 않고 집과 학교, 회사에서도 개인의 개성이나 특성을 존중하기 보다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대한다. 혼자 행동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부정적인 얼굴로 낙인 찍힌 개인주의는 ‘잘 사용되면’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 

의도적인 고립이 아닌 안전하고 든든한 가정과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잔잔하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여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유익한 단조로움을 즐길 수 있게 되면 독서와 고요가 주는 혜택 역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존중은 곧 한 사람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상호간 신뢰가 없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있지 못함에서 오는 불행은 분명 있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이미 수많은 책에서 인용된 이 멋진 말을 남겼다. 


인간이 겪는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어떤 강력한 힘을 본다. 그런 사람은 외부 자극에 훨씬 덜 영향 받고 덜 흔들린다. 독서는 외부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전적인 '나만의 시간'을 허락한다. 창문 너머 흔들리는 나뭇잎의 움직임과 빛깔만 보고도 그 안에서 노래를 찾고 책 한권이 주는 여유를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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