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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by jiinko Aug 06. 2020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아닌 좋은 독서와 나쁜 독서

<오독: 문학비평의 실험> by C.S. Lewis

한 때 한국을 휩쓸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와 문학적 친분을 나누는 나가사와는 와타나베 못지않은 애서가로 자신만의 확고한 독서 철학이 있다. 그 철학은 바로 사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 작가는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 그 이유이다.

인생은 짧기에 검증되지 않은 작품을 읽는 데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는 논리인데 나 역시 막 세상에 나온 신간들을 읽어봤다가 난해함에 갸우뚱해하고 독창성의 가면을 쓴 진부함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날려버린 적이 많다. 그래서 나가사와처럼 이미 검증된, 사후 수십 년이 지난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신용하며 책장을 고전 문학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고전적인 방식은 미적인 면에서 실패가 없는 법이다.


스타성과 화제성, 작품성을 모두 갖춘 아멜리 노통브의 데뷔작 -노통브는 사후 30년이 되기는커녕 아직 건재하는 동시대 작가이다-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깔끔히 수행된 어떤 임무에 대한 견해를 나타낸 문장이다.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일단 실패 확률이 명백히 떨어진다. 수십, 수백 년을 거치며 공격적인 평론가와 까다로운 독자, 급변하는 시대 사이에서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전 문학이라고 다 완벽하거나 나무랄 데 없는 건 물론 아니다. 현시대와 동 떨어지는 문화와 시대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여성을 맹목적으로 연약하고 수동적이며 멍청한 존재로 그리기도 한다. 천황이나 존경받던 장군이 서거하면 할복해 뒤따라 죽는 일본 유신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나 어릴 적부터 한 집에서 함께 양육된 이복 남매나 사촌지간이 부부로 짝지어지는 이야기에 반감이나 의문을 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와 인권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배울 수 있고 한 시대를 대변하는 책을 읽는 독자 중 한 명이 될 때, 나가사와가 가졌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책이 좋은 책이고 어떤 책이 나쁜 책인지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기 원한다. '문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내가 생각할 때 좋은 책은 언젠가 그 분야의 고전으로 남을 수 있는 책이고 나쁜 책은 유행이 바뀌면 시간과 함께 가치가 사라지는 책이다. 하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다. 사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자격도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한 의견을 내기에 내 자신이 한 없이 부족할 때 나는 종종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위치에 있는 지식인들의 의견을 빌려온다.

 



독자의 독서 유형을 통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분별하는 기준을 실험한 C.S. 루이스C.S. Lewis의 『오독:문학비평의 실험』이 연약한 내 의견을 세우는데에 확실하면서도 튼튼한 초석을 놓아줬다.

이 책을 두고 누군가 저자가 ‘꼰대’라는 평을 남겨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권리로 이 책이 좋다 나쁘다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느냐를 꼬집었는데 루이스를 ‘그녀’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 그가 어떤 작가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소위 ‘듣보잡’이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와 직설적인 표현으로 작품을 비평하니 건방지고 오만해보인 듯하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자 평이라 생각한다. 모든 예술 작품은 관객의 눈을 만나는 순간 두 번째 창조가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1989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그 건방지고 오만해 보이는 C.S. 루이스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잠깐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루이스는 이미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판타지 영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바탕이 된 소설의 원작자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고 30권이 넘는 그의 저서는 소설부터 아동문학, 비평서, 기독교 서적까지 방대한 장르를 아우른다.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만나 ‘잉클링즈’라는 독서 토론 모임을 가지며 친밀하게 교류했고 톨킨의 영향으로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회심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이 정도 이력을 가진 사람이 좋은 작품을 선정해 추천하고 권장한다면 지위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감사하게 덥석 받아도 모자랄 터인데 이런 행위가 모두에게 달갑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 나라는 사람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더 큰 비난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말을 들을지언정 다수에게 훌륭한 책들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행위라는 생각이 앞선다.


『오독:문학비평의 실험』에서 루이스는 주요 주제인 ‘문학비평’이라는 전문적이며 수준 높은 내용과 더불어 책을 판단하기에 앞서 독자들이 특정 책을 대하는 태도와 읽는 행위를 분석하고 분류함으로 그 책을 분별하는 새로운 문학비평 방식을 소개한다.


그는 대중적으로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예술 사용 방식에 대해 예술을 ‘수용’하기보다는 ‘사용’하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이 부류는 ‘예술 작품이 자기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길 기다리는 대신 그 작품을 가지고 뭔가를 하려고 성급히 달려들기’ 때문에 예술에서 버려지는 부분이 많이 생기며 ‘예술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딱 이렇다. 루브르에서 저 유명한 작품들을 코앞에서 보아도 잠잠히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히 달려든다. 즉시 어떤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내 실망하고 돌아선다.

이런 사람들이 문학을 대하는 태도 역시 비슷한데 흥미를 자극할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 책은 재미없는 책이 되어버리며 한 번 읽고 난 책은 이미 ‘사용했기’ 때문에 다시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 된다. 읽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이야기가 주는 사건과 결말만 가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사용’하지 않고 ‘수용’하면 훨씬 좋은 독서를 할 수 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기승전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길고 장황한 자연 풍경에 대한 묘사나 인간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은 불필요한 레토릭일 뿐이다. 때문에 책이 가진 가능성을 누려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더 값 싼 종류의 오락으로 옮겨간다. 루이스가 말했듯 ‘문체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거나, 못 썼다고 생각해야 마땅한 책들을 선호하기까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럼 못 썼다고 생각해야 마땅한 책이 나쁜 책인가? 그런 책을 선호하는 독서가 나쁜 독서인가?

누군가는 꼰대라 비난했지만 루이스는 결코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독자가 책을 대하는 태도로 그 책의 가치를 매기는 행위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우습게봤던 책들을 다시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쁘다고 생각하는 책이 누군가가 ‘정성들여 읽고 한결같이 사랑한 ’이라면 그 책은 그로 인해 비판의 채찍을 피해갈 자격이 생기며 다른 관점의 평가와 가치로 옷 입어 새로운 숨이 불어넣어진다. -물론 이 책에서 루이스는 주로 이미 그 시대에 인정받은 작가들을 놓고 그들의 작품을 비교하기에 현대의 말도 안 되게 쏟아져 나오는 책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마치 모두가 난봉꾼이라 여기는 이 옆에 한평생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여인이 있으면 그 남자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고전 문학만 편애해온 내 자신을 반성한다.


누가 봐도 B급 감성에 조잡한 구성이기에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티는 못내지만 계속해서 즐기고 싶은 책이 있고 영화가 있고 음악이 있다. 그런 작품들을 다시 접할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그 누가 그 작품을 폄하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나쁜 책, 나쁜 예술을 걸러내는데 급급해 평생 색안경을 끼고 살아온 나를 반성한다. 그렇게 정성들여 읽고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는 책은 책 자체의 가치를 높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좋은 독서를 하는 좋은 독자로 만들어준다.


C.S. 루이스는 최대한 쉬운 방식으로 문학비평을 소개하려고 시도한 것 같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매우 어려운 책이며 십년 뒤 다시 읽어도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내게도 새로운 비평의 관점을 열어주었다. 사람들이 읽는 책으로 그들의 문학적 취향을 판단하는 대신 그들의 읽는 방식을 보고 문학을 판단하는 새로운 비평 방식으로 ‘결국 좋은 문학이란 좋은 읽기를 허용하고 초청하고 강제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평생 충실하게 책을 읽어 온 우리는 작가들 덕분에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문학적인 친구와 대화를 나눠 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독서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 언어가, 세계가 넓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서 한 번 더 '좋은 책'에 대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긴다. 좋은 책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넓혀주는 책이다.  

'문학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허물지 않으면서도 상처를 낫게 해주는 경험'이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수많은 다른 사람이 되면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남아'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직접 침투해 모든 사건을 함께 경험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 단지 내가 함께한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나를 조금 더 살찌웠을 뿐이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대중들과 공유할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그 작품을 수용하는 대중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두고두고 다시 읽으며 평생 곁에 두어도 그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기만한 작품을 고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좋은 책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닌 좋은 독서를 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모든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첫번째 사항은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보라. 귀 기울여라 받으라. 작품의 길을 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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