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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05. 2020

책을 통해 만나는 세계

정말 오랜 시간 손꼽아 기다려오던 그리스에서의 공연이 2020년 전 세계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은 전염병의 여파로 취소되었다. 아무도 이렇게까지 커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러스는 희생자의 수를 먹고 살이라도 찌는 듯이 여전히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고 전염병을 다룬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갑자기 급상승 검색어에 오르고 문학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취소 소식을 받고 고집스럽게 인간들을 괴롭히는 그 보이지 않는 대상에 화가 났다.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까. 


올해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던 그리스로의 여정은, 적어도 나에게는, 단순히 공연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든 것이 기면 상태인 현재 상황에서 그리스는 새로운 삶의 막을 열어줄 수 있는 신비로운 세계로 보였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배우고 변화하지 않은 땅에서 변화를 꿈꿀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줄 것 같았다. 그 놀라운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에 관한 영화를 찾아보고 그리스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 받아들이고 들이마실 무수한 문화와 신화가 꿈처럼 펼쳐졌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정도의 노력과 기대밖에 없던 나약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훨씬 더 강력하고 심지가 굳은 외부의 힘에 의해 그 꿈이 분해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주기가,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리스에 관한 책을 통해 글자로라도 그리스를 여행하기로 했다. 비록 몸은 그리스 땅을 밟지 못했지만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그리스라는 역사와 문화로 비옥한 땅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그리스를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책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와 물리적인 그리스가 만나며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궁금하다. 




전세계를 가상으로 여행하게 해주는 독서는 그 효과에 비해 큰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취미에 비해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이미 출판된 지 수백 년이 된 고전 문학들은 만원 전후로 살 수 있고 대부분은 만 오천원에서 2만원, 비싸면 3만원을 넘어간다. 영화 한 편은 만 원이 넘고 뮤지컬 티켓은 5만원에서 10만원에 호가된다. 좋은 실로 뜨개질로 목도리를 하나 만들려면 7,8만원이 들어간다. 뜨개질을 좋아하는 내가 뜨개질을 자주 못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 거기에 바늘도 종류별로, 실도 종류별로 사야하고 남은 실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가고 처치할 수 없어 옷장 구석으로 쫓겨난다. 독서는 다르다. 딱 책 한권과 집중력, 그리고 적절한 환경만 준비되었다면 제대로 독서를 시작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이 갖춰진다. 


독서 습관은 어릴 때부터 잘 길들이는 것이 좋지만 혹여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늦지 않았다. 아직 우리가 살아갈 날이 많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며 몸이 쇠약해질수록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선입견으로 우리의 가능성을 묶어버린다. 심지어 아직 30대밖에 안된 나 역시 나이가 많이 들었음에도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자책을 하며 자괴감에 빠져 시간을 낭비한 적이 있다. 

독서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나이에 상관없이 시작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을 갖고 있어야 하겠지만 글씨만 읽을 수 있다면 70세에도, 80세에도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나이에 방 안에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유혹을 거부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64%가 60대 이상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괴테는 1832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831년, 만 80세에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를 완성했다(집필하는 데에만 거의 60년이 걸리긴 했지만). 얼마 전 85세의 나이에도 현역 번역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번역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 분 앞에서 마치 어린아이같이, 아니 아기같이 보였다. 그 자체로 습관이자 문화이자 공부인 독서는 노쇠해짐에 따라 젊은 시절 때만큼은 실력발휘를 하지 못한다 해도 나이와 함께 쌓아올려진 연륜과 지혜를 후세대에게 넘겨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독서는 상상속에서 세계를 여행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책에서 접한 세계를 실제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동을 무한대로 올려주고, 또 역으로 이미 가보았던 장소를 한 번 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자기 앞의 생』에는 모모가 사는 동네인 벨빌과 더불어 주 무대가 되는 피갈 거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 피갈 거리가 파리를 여행할 때 버스를 잘못 타 우연히 가게 되었던 물랑루즈가 있던 그 거리였다는 것을 알고나니 마치 그 때로 돌아간 듯, 또는 모모가 돈을 벌기 위해 나섰던 그 거리를 갔다 온 듯 그 냄새와 온기, 분위기가 머릿속에서 생생해졌다. 『오셀로』를 읽을 때에는 수상버스를 타고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풍경을 눈에 담느라 바빴던 베니스가 떠올랐고, 『산시로』에서는 순수한 산시로가 인생을 배웠던 도쿄를 한 번 더 걸었다. 여행과 책이 만났을 때 주는 가장 큰 혜택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21세기 최고의 지식인인 사르트르는 말했다. 우리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생각을 갖고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그 상상의 세계를 책이 나와 연결해 준다. 사르트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책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만나기를 바란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책을 집어드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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