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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24. 2021

바다에서 먼 산 보기


햇볕이 아주 강할 때는 파도가 녹은 수은처럼 반짝인다. 이게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수면 전체가 눈부시게 리듬을 만든다. 이 파도에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한다던데 강릉에 조금만 더 오래 있었어도 정말 파도에 꼭 붙잡힐 뻔 했다.



서핑을 할 때 아주 중요한 룰이 있다. 보드에 엎드려 있다가 적당한 파도를 잡아 두 발로 일어서고(테이크 오프) 보드에서 내려올 때까지 정면을 응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잔잔한 물 위에 서 있기도 어려운데 일렁이는 파도 위에서 정면을 보고 서라니, 처음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 역시 테이크 오프 10번 중 9번은 이 룰을 잊어버리고 아래 쪽을 응시한다. 내 발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봐야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 쪽을 향한다.


서핑하는 마지막 날,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에 물 속에 장장 네 시간을 버티며 손가락 발가락이 퉁퉁 불 때까지 보드에 올라탔다가 넘어지고, 빠지고를 반복했다. 딱 맞는 파도를 만나 백투터퓨처에 나왔던 호버보드를 탄 것처럼 해변까지 스윽 밀려나가는 그 순간을 잡기 위해 정수리까지 바닷 속에 담궈지고 손바닥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서핑으로 유명한 해변에는 서핑 강좌하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어쩔 수 없이 파도가 좋은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약간의 신경전도 있고 텃세 아닌 텃세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 신경전 속에 수십 명이 똑같은 목적을 갖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일종의 동지애 역시 느껴진다.

서핑 강사들은 적절한 파도가 오면 강습생의 보드를 뒤에서 밀어주며 언제 패들링을 할지, 언제 테이크 오프를 할지를 뒤에서 외쳐준다. 이 때 제일 많이 들리는 문장 중 하나가 "어딜 봐요!"이다. 모두가 중심을 잡으려고 자신의 발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단말마 비명을 지르며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 친다.


나도 자꾸만 내려가는 시선과 함께 넘어지기를 수십 번 반복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옆에서 강습하던 강사님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 강사님은 목청이 터져라 "먼 산! 먼 산!"을 외치고 있었다. 먼 산이라... 그래, 바로 정면에 듬직한 산이 있는데 왜 나는 내 발만 보고 있었던 거지. 삶에서도 적용되는 이 교훈을 파도를 타다가 깨닫다니.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바로 코 앞에 닥친 상황을 보느라 멀리 보는 걸 잊고 매번 무너지던 나였다. 담대하게 물 위를 걷던 베드로도 넘실대는 파도에 두려움을 느껴 발 아래를 내려다 보자마자 물에 첨벙 빠지지 않았는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는 실행하지 못했던 그 시선 처리를 실행에 옮겨 보기로 했다. 이 엄청난 교훈을 깨달았으니 이제 다시 중간에 넘어질 일은 없을 테다.


목이 빠져라 파도를 기다리다 저 멀리서 파도가 스멀스멀 다가와 얼른 보드에 올라타 온 힘을 다해 패들링을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헤엄치다가 파도가 내 보드와 맞닿으며 보드 뒤쪽이 살짝 뜰 때 상체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며 일어섰다. 두 눈은 저 앞에 있는 먼 산 꼭대기를 바라본다. 시선 처리는 성공했다. 이제 넘어지는 일은 없겠다며 당당하게 일어섰는데 일어서자마자 정말 창피한 모양새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눈과 코, 귀로 짠 물이 확 들어온다. 솔직히 매우 실망했다. 분명 먼 산을 봤는데.


실망이 조금 컸지만 멈추지 않고 이후로도 수십 번 더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물 위로 붕 뜬 채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순간을 잡았다. 바로 이거였다. 이 감격 때문에 사람들이 파도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딱 한 번 경험한 그 순간은 그 날 더 이상 만나지 못했지만 또 다시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다가 몸이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녹초가 된 채로 물 밖으로 나왔다.


물 밖으로 나오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다. 이 근처에 사는 것 같은데 참으로 행복한 강아지이다.


다음 날 얼굴과 손은 시커멓게 타고 온 몸이 쑤셨지만 저 멀리 산에 시선을 두고 파도가 부드럽게 나를 해변으로 이끌고 갔을 때의 그 감격은 아직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시간을  속에 있으며 체력을 단련하면서 교훈도 얻었다. 모든 것은 시선에 달려있다는 .  산을 바라보면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파도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목표 지점까지 밀어주는 기동력이 된다는 .


바닷가에 산다고 다 반짝이는 은빛이 아니고 서울에 산다고 마냥 팍팍한 게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이 우중충하면 내가 가진 색도 바래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곳이 저 위라면 감히 인간들은 모방하고 표현할 수 없는 하늘과 산과 바다의 색을 입을 수 있다.

현실에 부딪히면 바로 잊어버릴  뻔하지만  때마다  강사님의 외침을 기억할 것이다.


"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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