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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인 jiin mia heo Apr 16. 2022

내 괴로움에도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어

자기혐오와 번뇌 관찰기

 가끔 도무지 나랑은 절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기가 온다. 그럴 때 드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유독 스스로를 못 견디는 날에는 서툴고 실패하는 내 모습을 들키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그걸 기다리는 지경에 이른다. 정작 그 순간이 오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그 순간을 상상하면서 나를 괴롭힌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의 사소한 모습이 엄청난 결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일상이 대단한 성취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민은 실체도 있고 이유도 있는 것 같지만 내 고민은 영 하찮고 답이 없는 것 같다. 그럴 때면 타인에게 상처주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말을, 나한테는 아주 쉽게 해버리고 만다. 완벽한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건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무엇이든 한 방에 해내는 나,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똑똑한 나, 서투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능숙하고 이상적인 '나'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 허구의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달하지 못 하는 순간 스스로를 마구 혼내기 시작한다. 넌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왜 그것도 못 해? 근데 어쩌겠나. 못난 나도 나다. 하지만 못난 내 모습은 내가 아니라는 이상하고 굳센 믿음은 영 손을 쓰기가 어렵다. 스스로의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화하지 못 하는 시간들이 쌓이면 순식간에 감당하기 어려운 자책과 자기혐오에 빠진다. 과거의 선택을 심하게 채찍질 하고, 미래의 불안을 불필요하게 키워 나가며 빠른 속도로 나를 몰아 세우기 시작한다.


 자기혐오로 점철된 마음과 함께 살기란 날 피곤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과 24시간 붙어 있는 것과 같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 경우엔 그 사람 욕이라도 할 수 있지, 이 경우엔 밖으로 나가야 할 분노도 안으로 곪는 우울이 된다. 며칠 전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살아야 하지?’라는 말을 했다. 근데 그건 등잔 밑이 어두운 거였다. 가족이랑 같이 사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데 난 대체 어떻게 나랑 같이 살고 있지? 예전에 만들려다가 포기했던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떠올랐다. ‘너는 어찌 내가 되었나’.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주기적으로 맞닥뜨리는 질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만드나. 오래 묵은 자기혐오는 왜 잠잠하다가도 가끔씩 이렇게 나를 뒤흔드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유희왕 오프닝송이 생각나서 맥없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유희왕이 두 명이었지? 빛과 어둠의 영혼을 가졌다고? 나잖아?


유희왕 오프닝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런 척 할 수도 없고. 그게 맞는 거잖아.'


 요새 주구장창 듣는 노래의 가사인데, '우리'가 거울 속의 나 자신과 그 거울을 보는 나를 뜻하는 거였다. 스스로와 친구가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 같다. 타인을 대하는 나와는 급속도로 친해질 지도 모르겠으나 나를 대하는 나는 세상 깐깐하고, 한 치의 너그러움도 자비도 없으며,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나 자신을 사랑해야 남들도 나를 사랑해줘요'라는 문장이 떠오르는데, 사실 이건 맞지 않는 문장 같다. 오히려 그 반대 아닐까.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나처럼 자기혐오에 취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본인 이외의 것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이 항상 편치 않고 피곤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로 사는 게 편하지 않다. 여전히 나에 대한 집착이 넘치는 바람에 밖으로 향할 에너지가 늘 부족하다. 누군가에게 쏟아야 할 관심도 스스로에게 향하고, 누군가에게 짊어야 할 원망도 스스로에게 향한다. 주고 받는 에너지 모두 한곳에 공존하니 순환이 될 리가 없다. 곪아 터지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은 필터도 눈치도 브레이크도 없다. 누굴 붙잡고 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이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무턱 대고 나 자신을 좋아하기엔 자기혐오는 오래된 내 동반자와 같아서, 정 없이 한 번에 뚝 끊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한테서 자기혐오를 뺀다면 그게 과연 나일 수 있을까?


Phoebe Bridgers(피비 브리저스)


 'my whole brand is self hatred.'


 어느 인터뷰에서 피비 브리저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 브랜드는 자기혐오야'. 골 때리지만 통쾌한 문장이었다. 억지로 스스로를 좋아하려고 애쓰기보다 그냥 자기혐오를 인정하고, 그걸 브랜드라고 말해도 되는 거였다니.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같은 문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결국 위안을 주는 건 세상에는 스스로를 싫어하는 사람이 도처에 널렸다는 거다. 슬플 때 기쁜 음악보다 슬픈 음악을 들어야 빨리 기분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를 사랑하세요!'보다는 '나도 나 싫어해!'라는 말인가 보다. 모두 홀로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나를 싫어하는 마음 또한 모이면 그 속에서 공감과 연대, 사랑이 피어날 수 있다.


 너무 괴로운 시기가 찾아올 때마다 그런 땡깡을 부렸다. '다자이 오사무의 괴로움은 인간실격이라도 낳았지, 내가 이렇게 괴로운 건 대체 무슨 쓸모가 있지?'. 다자이 오사무만큼 괴로운 사람이 많을진 몰라도 누구나 다자이 오사무처럼 글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수치심에 대해 역설하는 브레네 브라운을 보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던 것처럼, 내 안의 자기혐오를 들여다 보고 나누면 손톱 만큼의 쓸모라도 찾지 않을까? 수치심을 언어로 보는 것 자체만으로 큰 도움이 됐듯이 나도 그냥 자기혐오를 바라보고 발설하기로 했다. 자아가 너무 비대한 나머지 나 또는 누군가의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수그러 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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