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사회성만큼 개인성을 키우자.
사람에게는 누구나의 고유성과 독특함이 있다. 고유성과 독창성을 인정해주고 이해해주며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줄 때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아이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격려하기 보다,
순응하기를 원하고 순응을 교육하고 훈육하는 일이 많다.
개인의 독창성과 고유성이 집단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의 효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훈육처럼 보이지만, 좀 맞춰주면 안돼? 시키는 대로 해! 라는 강요가 될 때도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집단의 유지에 해악이 되는 고유성과 독특함이라면 제한과 통제가 필요하겠으나
안타깝게도 남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집단으로부터 안 좋은 평판을 받을까 염려가 된다는이유로 아이들의 고유성과 독창성에 칼을 댄다면,
병도 없는데 칼을 대고 생살을 도려내는 격이 아닐까?
썩을 살은 도려내야 하겠으나, 생살을 남과 다르다는 이유, 미움 받을 지 모른다는 이유로 도려낸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성과 독창성이라는 살점이 떨어져나가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에게는
너를 위한 거야, 모두를 위한 거야, 이게 커가는 과정이야라는 훈계와 교육으로 위장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보다 관행에 따른다.
원칙을 찾기 전에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한다.
조직에 순응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따르는 사람은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 꼭 필요한 "착한 사람"이 되고
개성을 발휘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개성을 발휘하는 사람은 "안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스스로의 욕구보다 사회의 요구, 학교의 요구, 부모의 요구에 충실할 때 박수를 쳐주는 현실은 유감스럽다.
통제와 사회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아이들은 개인성, 창의성, 자발성 발휘가 어려워진다.
통제에 길들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창의성은 거창하지 않다.
나답게 사는 것이 창의성이다.
나다워질수록 창의성도 커진다.
남들처럼, 남들 하는대로, 남 부럽지 않게 등등
기준을 남에게 두는 말이다.
왜 기준이 타인이 되어야 하나?
남이 왜 내 삶의 가이드라인이며,
왜 개인이 뛰어 넘어야할 한계가 남이 되어야 할까?
이기적이다, 자기만 안다, 특이하다, 튄다 등
공동체 의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에 대한 시선이 특히 따갑기 때문이지 싶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할 때 주변의 눈치부터 살피고,
(모두에게) 좋은 게 (나에게도)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투덜이로 찍히고, 모난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이 방식에 따를 수 밖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우선 개인적인 것에 대해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에게는 사회성만큼 개인성도 필요하다.
아이의 사회성을 키우려는 노력만큼 .
아이들이 본인의 자아, 개인적 고유성을 깨닫게 도와야 한다.
남을 위하고, 더불어 잘사는 법만큼
나를 위하는 법도 가르쳐주어야 한다.
내 생각을 말하는 게 나만 옳다는 편협함과 오만함이 될 수 없다.
나만 위한다면 이기심이나, 나부터 위하는 건 개인성이라는 것도 분별해주어야 한다.
창의성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개인성,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
남들처럼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남부럽지 않게, 남들 하는 대로 하기보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분리되어야 하고
(그것이 아이일지라도)
서로 다른 삶의 영역이 존중받아야 하고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것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