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의 작은 흔적 #3
요 몇 일간은 정신이 없었다. 첫 날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거렸던 제주 카페였거늘, 서울의 일상처럼 차가운 콘센트를 찾아 노트북의 전원을 꼽는다.
평화롭기 그지 없었던 게하의 쿠션 털기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일거리가 되었다. 데드라인을 못 맞추고 버둥거릴 때는 영락없이 사무실의 직원마냥 성질이 나기도 하고.. 해안을 산책할 때 조차 예상한 시간을 초과했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나는 여전히 조급했다. 그러나 조급한 나의 마음과 달리 제주의 바다는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어제는 될 수 있으면 아침 바다를 보자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이른 시간 산책을 나갔다. 주말부터 태풍이 도사려 날씨가 한참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시간을 들여 길을 나섰건만, 시야에 모래가 낄 정도로 무진장 바람이 불었다. 지난 밤 취객이 진상을 부린지라 제주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햇볕까지 사라지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서울이든, 제주든 어딜 가나 똑같은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환경의 힘보다 사람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관성이 더 강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오늘은 웨이팅이 길다는 유명한 맛집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평소와 달리 바다 짠내가 났다. 돌아보니 기운차신 할머니들이 해변가에 가득찬 톳들을 하나하나 도로로 옮기고 있었다. 아마도 요 몇 일 새 강한 바람 덕택에 육지로 가득 밀려온 듯 싶었다.
나에게는 우울했던 날씨가 누군가에게는 더없는 행운이 아닌가.
"제주도는 태풍이 불면 육지에서 부리나케 표를 예약하는 사람들이 있어. 파도가 쎄서 서핑을 하기 딱 좋거든."
일전에 게하에서 우연히 만난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다. 동네 곳곳에 널려있는 풍력 발전기는 맑은 날보다 더 힘차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래, 나와 달리 태풍이 와서 신이 난 이들도 참 많았다.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다. 이전에는 쉽사리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이라 결론짓자고, 그것이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제주는 철없는 나를 따끔하게 쓰다듬는다. 태풍도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무엇이든 하나의 결과를 낳는 것은 없음을.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도 누군가에게 득이 될 수 있음을. 이러한 이치를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