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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O 지나친 조각들 Oct 02. 2020

첫 유럽 여행, 그땐 그랬지

우리를 지켜줘요! 지.퍼.팬.티.

듣똑라 126화 한가위 특집/듣똑러의 우당탕탕 랜선 여행기를 듣는데, 지퍼 팬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찌나 웃기던지, 그 묵직함이 느껴진다는 표현에 깔깔거리며 열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얽힌 나의 첫 유럽 여행이 생각났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자그마치 7년 전이다. 대학생 2학년이 되어 친구와 여름 방학 때 떠날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열기구 사진에 반해 터키라는 나라로 여행을 가자고 다짐을 했다. 이제 막 중간고사를 마쳤을 뿐인데, 이미 마음은 열기구를 타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갔던 해외여행이 아닌 친구와 한국 밖으로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유럽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두 정보를 찾는 "유랑" 카페에 가입도 했다.



직항은 쳐다도 보지 않고 경유 비행기만 온갖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저렴한 티켓을 노리고 있었다. 갑자기 뉴스에 터키에서 유혈 시위가 일어났다며 온갖 보도 자료가 올라왔다. 그 당시에는 유혈 시위라고 하니 나에겐 전쟁처럼 느껴졌다. 너무 위험하다며 친구와 밤새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카파도키아 열기구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가보지 못한 그 땅을 언젠가 밟을 수 있지 않을까.



첫 유럽 여행은 서유럽을 도는 게 보편적인 경로였지만, 그걸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터키 여행으로 잡았던 예산도 서유럽을 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동유럽을 가자고 바로 다음 날 마음을 돌려세웠다. 마음이란 게 참 가벼운 게, 열기구를 타는 모습은 상상하지도 않았던 마냥 "동유럽 여행지 추천", "동유럽 여행 코스" 검색어를 초록창에 열심히 치고 있었다. 지금이야 수수료를 내더라도 체크카드를 쓰겠지만, 그땐 여행 예산 전부를 유로로 들고 갔다. 동유럽은 유로화를 쓰지 않고 고유의 화폐를 쓰는 나라들이 꽤 많다. 우리가 갔던 체코도 헝가리도 크로아티아도 자체 화폐를 사용했다. 어떻게 그 예산을 안전하게 간직하며 여행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남대문 시장을 다녀온 엄마가 지퍼 팬티라는 게 있다며 알려주었다. 팬티에 지퍼가 달려 있어서 사우나 가는 사람들이 사용한다고,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도 많이 사간다고 들었다면서. 유레카. 이거다 싶었다. 팬티는 내가 옷 속에 입고 있으니 손을 넣어 훔쳐갈 수도 없고, 숙소에서 털린다고 해도 누가 속옷을 뒤지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유랑 카페에서 요즘 소매치기는 복대도 떼어간다는 글을 봤기에 복대를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퍼 팬티를 각 3장씩 구매했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M사이즈를 구매했는데도 굉장히 컸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에 소중한 지퍼 팬티를 온 동네에 추천했고, 그다음 해에 유럽 여행을 다녀온 동기가 닭갈비 집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야 난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이거 보여? 이 닭갈비 판만 하다니까.

그렇다. 동기야, 그래도 닭갈비 철판보다는 작았어.



바로 입을 수는 없고 속옷을 착용하고 그 위에 지퍼 팬티를 입었다. 묵직했다. 돈다발이 그 안에 있는데 가벼울 리가 있을까. 첫 유럽 여행이니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는가. 우리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지퍼 팬티를 착용했다. 동전은 검색대에서 걸릴 수 있으니 지폐만 넣어서 묵직한 상태로 15시간을 날아갔다. 기저귀를 찬 기분이었다. 아래는 묵직했으나, 마음은 가벼웠다.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호스텔에서도 잘 때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 누가 내 돈을 건들 수 있으랴.



문제는 남들은 현금이 떨어졌을 때,
남들은 현금 지급기에 가지만 나는 화장실에 간다는 거..
<듣똑라 126회>



우리는 현금이 떨어지면, 옷 가게에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아무 옷이나 들고 탈의실에 들어가 지퍼를 열고 필요한 현금을 꺼냈다. 또 다른 문제는 바지를 입을 수 없다는 점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바지가 지퍼 팬티의 산을 넘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여행 초반에는 치마를 입고 다녔다. 여행의 반이 지나고 나서야 지퍼 팬티가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챙겨간 반바지도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여행 내내 지퍼 팬티를 착용하지는 않았다. 초반에 한인 민박에 잔여금을 내고, 여행이 반쯤 지나 가벼워질 때쯤 마음에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지퍼 팬티를 캐리어에 다시 넣고 필요한 현금만 챙겨서 바지를 입고 돌아다녔다.



다시 지퍼 팬티를 착용한 건 부다페스트에서 자그레브까지 가는 8시간이 넘는 기차를 탈 때였다. 당시 급하게 일정을 변경해 기차를 탔기에, 지정된 좌석도 없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기차를 탔다.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복도도 화장실 앞도 꽉 차있었다. 우리는 화장실 앞에 겨우 자리를 찾아 쪼그려 앉았다. 이러다 쪄 죽는 게 아닐까라며, 피난 열차를 담아낸다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 힘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생수를 수건에 적셔도 5분이면 물기가 다 말랐다. 어떤 외국인이 갑자기 덥다며 기차 문을 열어젖힌 것도, 국경에서 한 명 한 명 여권 검사를 하느라 1시간 넘게 정차한 것도 다 추억이다.



지퍼 팬티의 마지막은 비행기를 놓친 다음 날이었다. 우린 귀국 행 비행기를 놓쳤다. 왜 대체 공항에 1시간 전에 도착하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아직도 아빠는 내 친구를 그 비행기 같이 놓친 애로 기억하고 친구 아버지도 나를 그 비행기 같이 놓친 애로 기억하신다.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된다는 생각에 카운터로 갔지만, 프라하에서 두바이까지 뜨는 비행기 편은 하루에 한 대 밖에 없단다. 그리고 인천까지 가는 비행기는 일주일 동안 꽉 차있다는 말을 들었다.



비행기를 놓쳤다는 카톡을 새벽에 받은 아빠는 너무 놀라 당시 여행사에서 일하시던 친구분께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두 분이 새벽 내내 사이트를 새로고침 하면서 빈자리가 있는지 확인했다. 친구 어머니가 아시는 분의 제자 분의 집에서 하루 밤 머물게 되었고, 프라하 시간으로 새벽 3시에 전화가 왔다. 두바이에서 인천까지 오는 비행기 두 자리가 취소되었으니, 아침에 당장 시내에 있는 에미레이트 사무실로 가서 티켓을 끊으라고. 아침은 마트에서 물이랑 과자 하나를 사서 나눠먹었다. 어제 귀국하는 줄 알고 남은 코루나를 썼으니, 탈탈 털어 남은 동전까지 긁어모았다.



사무실에 가니 두 자리가 비었으니 추가 요금을 지불하면 된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은 예산으로 면세점에서 뭐라도 하나 살까 했던 꿈은 전날 놓친 비행기와 함께 우리를 떠났다. 현금을 찾아오겠다며 길거리로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현금 지급기는 무슨 골목 구석으로 가서 지퍼를 열었다. 구석에서 엉거주춤 뒤돌아 지퍼를 여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어이가 없고 웃기던지. 남은 돈다발을 세니 딱 추가 요금만큼 남았다. 그렇게 지퍼 팬티와 이별을 했다.

겁이 많았지만 용감하기도 했던 그 시절


겁이 많아서 입었다.
지.퍼.팬.티.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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