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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O 지나친 조각들 Sep 22. 2020

어쩌다, 핸드볼(1) 우리가 한 팀이 되기까지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시작은 햇빛이 내리쬐는 해변가였다. 2018년 9월에 엔지니어 2학년(=석사 1년 차)으로 들어갔고, 교환학생을 온 유일한 6명의 친구들과 WEI(Weekend integration, 새터와 MT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캠프)에 갔다. 외국인들과 친해지고자 다가온 프랑스 친구들과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배구를 하는 중이었다. 공을 넘겨 주고받는 시간보다  흘러간 공을 주우러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 누구도 잘 못하든 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뛰어놀다가 맥주도 마시고 해변에 누워 눈을 붙이기도 하고 학생회가 준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테마가 해리포터여서 대걸레를 다리사이에 끼우고 퀴디치 경기라며 들판을 뛰어다녔다. 저녁을 먹고 파티하러 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같이 배구를 했던 친구들이 강당에서 반갑게 맞이하며 영업을 시작했다.


"핸드볼 팀 같이 하지 않을래?"
"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선수 영입은 적어도 공이라도 만져본 사람에게 해야 하는  아닐까.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피구, 축구, 농구, 배구, 야구. 공으로 하는 운동은 중학교 체육시간에 해봤지만. 핸드볼은 우행순으로 알게 되었고, 올림픽 때 태극 마크를 단 선수들의 경기를 응원한 게 다였다. 룰도 모르고. 공을 만져본 적도 없었다.


"아냐 괜찮아 나도 작년에 시작했어. 재밌을 거야!"
"8명은 돼야 경기 뛸 수 있는 팀이 되는데 우리가 5명이거든"
"나 진짜 핸드볼 룰도 모르고 공도 만져본 적 없어"
"같이 하면 정말 재밌을 거야"

"생각해볼게"


얘네 정말 절박하구나. 인원수 채우려고 나 같은 신입을 팀으로 넣으려고 하다니. 핸드볼을 해 본 누군가는 팀에 들어가겠지. 곧 인원 채워지겠고 다른 학교들과 경기를 뛰겠지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겼다. 그게 내가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교로 돌아와 수업 시간에도 친구들은 나를 영입하려고 했다. 스포츠 접수 기한이 끝났는데도 코치에게 가면 된다고 재밌을 꺼라며 나를 꼬드겼다. 접수 서류를 제출하고, 팀에 속하고 싶다며 35유로를 결제했다. 연습만 하고 팀에 속하지 않으면 10유로이다. 건강 검진서를 제출하는 대신에 나는 건강하며,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책임이라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 함부로 사인하면 안 된다던데. 조금 걱정이 됐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친구 따라 핸드볼팀에 속하게 되었다.



핸드볼을 해본 적은 없지만 팀으로 경기를 치렀던 기억이 있기에 함께 하자며 내민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 체육대회는 축제보다 더 중요했다. 목숨 걸고 덤볐다. 응원단, 농구, 달리기, 피구 등 여러 경기가 있었지만 나에겐 피구가 전부였다. 우리 팀은 모든 걸 함께 불태웠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기도 하고, 가장 끈끈했던 관계이기도 하다. 점심시간을 줄여서 연습하고, 야자 시간에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서 신발 모서리로 피구 라인을 그리고, 주말에도 학교에 체육복을 입고 나왔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우리를 가르쳐줄 코치도 없었다. 언니들과 동기들과, 동생들과 맞춰가며 배웠다. 간절하게 우리 팀이 이기기를 바랐고, 함께 압박감을 나눈 동지들과 함께 진 게 억울해 울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피구 이야기를 하고, 우리가 얼마나 열정을 불태웠는지를 추억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을 함께 나눴던 이들이 겹쳐 보여서였을까. 내가 마주 잡은 손은 18살이었던 내가 내민 손이었나 보다.



생각보다 대표 팀은 크지 않았다. 학교 전체에 학생들이 1000명이 되지 않고, 학교에서 연 스포츠 프로그램인 축구 배구 배드민턴 농구 러닝 크로스핏 핸드볼 중에 핸드볼 팀이 가장 인원이 적었다. 남녀 팀 모두 합쳐도 20명이 되지 않았다. 인원이 많지 않고 코치도 한 명이라 남녀 구분 없이 함께 훈련했다. 기초 체력 운동을 하고, 공으로 동작 연습을 하고, 남녀 나눠서 각자 팀 훈련을 하고, 섞어서 연습 경기까지 월요일 6시부터 7시 반까지는 시간표에 핸드볼이 적혀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선수 활동을 해 온 친구부터 공을 처음 만져보는 나까지 인원수만큼이나 다양한 수준이었다. 물론 팀의 구멍은 나였다.



코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멋진 사람이지만 훈련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우리 팀 9명 중에 5명이 초보자였어도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훈련했다. 부딪히며 배우는 방식이었다. 룰은 어기고 나서야 이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하고 배웠다. 공을 들고 3 발자국을 움직일 수 없어, 공을 받으면 마음이 급해져 바로 패스를 했다. 설명을 해줘도 바로 못 알아듣고 매번 친구들이 몇 번이나 다시 설명해주고 다른 친구들 하는 것을 따라 하며 배웠다. "J'ais pas compris (나 모르겠어)"를 반복하며 실수하고 민망해서 웃는 모습만 가득했다. 훈련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더 작아 보였다.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동작 연습까지는 눈치껏 따라 할 수라도 있었지만, 문제는 팀 훈련이랑 연습경기였다.



룰도 모르는 애가 무조건 연습 경기에 들어갔으니... 결과는 참담했다. 아직도 두고두고 놀림받는 이야깃거리가 가득 쌓였다. 떨어진 공을 주우러 달려가는 친구를 몸빵으로 쳐냈다거나(친구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 친구가 나랑 체구가 비슷했던 것이지 결코 내가 달려가는 코뿔소였던 건 아니다. 그땐 이름도 몰랐던 사이지만, 지금 그 친구와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공을 이미 들고 점프하는 친구를 몸빵으로 막았다던가, 공을 넣겠다는 다짐으로 무작정 몸으로 달려들었다던가... 나랑 반대 포지션인 친구들은 모두 나한테 최소 한 번씩 들이 받혔다. 아무래도 핸드볼이 아니라 럭비를 했어야 했다. 그렇게 온몸으로 부딪히며 팀이라는 이름이 차츰 스며들기 시작했다.



매 연습마다 난리를 치고도 첫 경기를 뛰지 못했다. 수비하는 과정에서 같이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렸기에. 바닥을 구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절뚝이며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며 웃어넘겼다. 다음 날 팅팅 부은 발목을 이끌고 학교로 향했다. International office에 부탁해 당일 의사 예약을 잡았고, 한 달은 핸드볼이고 운동이고 금지라는 처방을 받았다.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발목 보호대를 차고 절뚝거리며 한 달을 보냈다. 꿈에 부풀었던 첫 경기를 뛰지도 못한다는 게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한편으로는 팀에 짐이 되지 않아도 되어서 안심이 되었다. 주섬주섬 유니폼을 같이 입었다. 우리 팀의 첫 경기는 응원단이 되어 목소리로 팀과 함께 경기를 치렀다. 경기를 무사히 마친 친구들이 자랑스러웠고 대견했다. 몸은 벤치에 앉아 있지만, 뛰어다니고 소리치는 친구들과 힘께 목소리로 마음으로 함께 했다.



수비를 뚫는다는 건 같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고, 함께 골대를 향한다는 건 서로를 믿는다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두발로 뛰는 선수들도, 골대 앞을 지키는 선수도, 벤치에 앉아 응원하는 선수도 같은 마음이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유니폼을 입는 팀이 되었다. 골대 앞에서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은 처음으로 다 같이 남긴 사진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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