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던 시절 대명절 귀향길 교통수단 에피소드
누구의 추억이 든 간에 어릴 적 기억은 소중하고 예쁘다.
너나 누구라 할 것 없이 뭐라도 해서 먹고는 살아야 했던 그 시절에는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서울로만 모두가 떠나갔다.
그러나 정작 서울로 몰려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식집, 중국집, 일식집 등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바로 접할 수 있었던 곳에서 일을 하면서 겨우겨우 의식주를 해결하거나, 아니면 가내수공업이나 소기업에서 온갖 허드레 일을 하면서 겨우겨우 의식주만을 해결했고, 아주 적은 돈을 월급으로 받으면서 가녀린 생명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추석, 구정(설) 등 큰 명절이 돌아오면 누구라 따로 구분해서 말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고향을 떠난 지 얼마가 되었는지를 따지기는커녕 무조건 적으로 객지인 서울 등 대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큰 성공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폼을 잡으며 여러 선물 보따리를 챙겨서 그리운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자동차나 대체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귀향을 할 수 있었지 별다른 방법들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많지 않아 한정되어 있는 상태로 근거리는 직행버스, 장거리는 고속버스, 비둘기호 (완행열차), 무궁화호, 새마을호가 대중교통의 전부였다.
따라서 명절이 다가오면 귀성열차나 버스 예매날이 정해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경부선과 호남선 예매일정이 다르게 공지가 되어 언론에서 알려 주면 고속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예매표를 끊기 위해 해당 날자 언저리에 한꺼번에 몰려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밤 새벽 구분 없이 지정된 전날 저녁부터 시작해서 예매가 끝나는 순간까지 노숙을 하거나 길게 줄을 늘어서 기다리는 모습이 요즘 중국에서 명절 때 인구가 대이동을 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몰려들 듯이 당시 우리의 모습들도 그러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터미널이나 역광장에 예매표를 끊기 위해 나가거나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귀성객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여유가 되는 사람이 아니면 그것마저도 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대중교통 표를 구하지 못하면 명절 전일에 아무런 대책 없이 요행을 바라며 무작정 새벽부터 기차역이나 터미널에 나가서 혹시 취소표가 나오나 하면서 토끼처럼 눈과 귀를 쫑긋 세워가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려야 했고, 아니면 역매표구의 자그마한 반달모양의 타원형 유리구멍에 머리를 밀어 넣을 듯 들이대며 아주 작은 어떠한 정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한순간도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행위들이 다 그리운 추억이지만,
그러다 혹시 입석표 한 장이라도 추가로 발생한다거나 취소표가 나오면 그거라도 쟁취하고자 구걸 아닌 구걸을 했던 경험들을 누구나 귀성객이었다면 한 번쯤 겪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취소표는 나오질 않는 날에는 여지없이 어디서 구한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귀향을 못하게 되어 되파는 표가 있다면서, 여기저기서 암표상들만이 다가와 고향 하늘이 그리워 조급해 어쩔 줄 몰라하는 귀성객의 마음을 실제 가격 보다도 몇 곱절 비싼 금액을 부르면서 팔려고 하는 암표상들이 순수한 귀성객의 마음속을 뒤집어 놓기가 다반사였다.
어렵사리 우여곡절 끝에 입석표라도 구해서 기차나 고속버스에 오르면 규정인원과는 전혀 관계없이 엄청나게 많은 귀성객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숨이 막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 고향 터미널이나 역전에 부디 빨리만 도착하기를 학수 고대 해야 했으며 그러한 많은 시간을 힘들고 괴로워해야만 그리운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대안 방법으로는 터미널이나 기차역 근처에서 각 지역별로 여러 곳을 들르면서 고속도로 톨게이트 근처에 무단으로 정차해 내려 주는 조건으로 출발하는 일반관광버스를 찾아서 대중교통보다 두 배는 비싼 요금을 지불하고 가야만 했다.
그런 반면에 혹여 어떤 인맥이라도 있어서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중견기에라도 취업을 해서 다니는 사람들은 해당회사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는 귀향용 관광버스로 고향에 갈 수 있어서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한 험난한 지옥 같은 귀향길에도 빈손으로는 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떤 이는 먹거리들을 또 어떤 이는 커다란 미닫이 문이 달린 TV 등 가재도구를 또 어떤 이는 식구들 선물 꾸러미를 그리고 어떤 이는 동생들 학용품 등등 각자의 형편과 취향에 맞춰 본인의 몸무게 보다도 더 크고 더 무거운 짐보따리를 둘러메고서 고향을 향해 가는 길이 엄청나게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건만 오랜만에 자신을 보면서 즐거워할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객지에서 고생할 거라고 근심과 걱정하셨을 부모님들의 마음과는 다르게 무탈하게 잘 살고 왔다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한 무언의 암시를 안고 그립고 그리웠던 고향집에 도착한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고향에 도착했으면서도 그저 편안하게, 그리고 아무런 고통도 시련도 외로움도 어려움도 없이 행복하고 즐겁게만 도시에서의 생활을 해서 많은 돈을 벌면서 여유 있게 생활하다 온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 본인 자신의 마음도 부모님도 형제들도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도시생활의 현실은 저 깊숙한 곳에 숨겨 둔 체, 본의 아니게 모두를 속이고 만 이중성격의 소유자가 되어 버렸고,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에서의 짧은 며칠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아픔과 두려움과 아쉬움을 가슴속 깊은 곳에 한아름 안고 자신들의 일터이며 앞으로도 현실을 부정하지만 부정과 상관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적 삶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전과 전혀 다름이 없는 힘든 일상으로 생활터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벌집처럼 여기저기 뚫려 있어서 수많은 자동차들이 있고 KTX 같은 고속철도가 있고 비행기가 있고 바다에는 쾌속선들이 있었다면 그러한 험난한 인생사의 고생들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추억 속의 그리움도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을 것이다.
아래 "고향(어머님)" 글로 마무리합니다.
"고향(어머님)"
늘
그립다
보고 싶다.
항상
만지고
보듬고 싶다.
언제나
안고
또 껴안고 싶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사랑하고 싶다.
그리운 고향
그리고
어~~ 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