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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겜노인 Nov 23. 2018

게임 멸망 '아타리 쇼크'는 왜 벌어졌을까?

[세상을 움직인 게임]  83년 북미 콘솔 게임 시장 붕괴 사건

1983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1982년까지 30억 달러 규모까지 미친 듯이 성장하며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이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간 1985년이 되자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규모는 종전의 3% 수준인 1억 달러 수준에 그쳤다. 수많은 게임 업체가 도산했고 그중에선 비디오 게임 시장을 이끈 수장이자 산업의 핵심 존재였던 아타리도 포함됐다.


이 사태가 바로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으로 불리는 '아타리 쇼크'(ATARI Shock)다.


게임 회사 아타리는 1972년 6월 놀런 부슈널에 의해 설립됐다. 이 회사는 그해 11월 '퐁'(PONG) 게임을 선보이며 게임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무수한 게임들을 선보이며 게임을 '비즈니스' 측면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당시 퐁의 신드롬은 디지털 문화 산업의 토대로 인식되고 있으며, 놀런 부슈널이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아타리는 게임 개발에서 '게임기' 개발로 눈을 돌린다. 플랫폼을 장악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이 될 것으로 판단한 놀런 부슈널은 1976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2천8백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한 후 게임기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바로 1977년 출시된 '아타리 2600'이다. 2세대 가정용 게임기의 시작이자 게임 대란의 시초이기도 하다.

비디오 게임 시장의 기폭제였던 '아타리 2600'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1977년 9월 11일 북미 시장에 출시된 아타리 쇼크는 본지에서도 소개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https://brunch.co.kr/@jikigame/24)보다 한층 변화된 기술력으로 단번에 소비자들을 매료시켰다. 아케이드 게임이었던 유명 게임들 -특히 스페이스 인베이더- 을 가정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과 롬 팩을 교체하며 다양한 게임을 취향에 맞춰 즐길 수 있다는 점, 고급스러운 외형 등으로 199달러라는 높은 가격에도 큰 인기를 구사한다.


놀런 부슈널은 그해 11월 '동종 업계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퇴사하게 된다. 그의 퇴사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지만 회사 경영에 대한 이슈와 시장 다각화 전략에 대한 반대 등이 주요 이슈로 꼽힌다. 그가 떠난 후 아타리 후임 대표로 레이몬드 에드워드 카사르가 발탁되고 그는 섬유 업계 경험을 이용, 제작부터 유통 전반적인 부분을 안정화시키며 아타리를 성공적인 회사로 발돋움시킨다.


그러는 사이에 내부에서는 위험한 싹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아타리에서 개발되고 출시되는 모든 게임기 및 소프트웨어의 권리를 독점했다. 게임이 대 성공을 거뒀지만 개발자들에겐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 문제가 쌓이자 1979년 5월 다수의 내부 프로그래머들이 대표에게 게임 판매에 대한 저작권료와 게임 내 개발자들의 이름을 넣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표는 이를 무시했고 그들은 결국 퇴사하게 된다.

액티비젼이 아타리 2600으로 내놓은 핏풀 <사진출처: 벤처스퀘어넷>


재미있는 건 이때 당시 퇴사했던 인력들이 모여 창업한 회사가 바로 '액티비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자. 주요 개발자들이 사라진 아타리 입장에선 게임기의 판매량을 주도할 게임이 절실해졌다. 이때쯤 몇몇 개발자들은 아타리를 직접 분해해 분석한 후 게임을 개발하기도 했고, 당연히 액티비젼 역시 자체적으로 아타리 2600용 게임을 만들어냈다. 


이에 분개한 아타리 측은 저작권 침해 협의로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없인 활로를 열 수 없던 아타리는 액티비젼을 비롯해 다수의 업체와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화해를 하게 된다. 이때 처음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서드 파티'다. 공식적으로 아타리 2600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그들은 80년대 초반 게임 산업의 전성기를 이끈 주옥같은 명작들을 쏟아내며 대폭 성장하게 된다.


1980년 한 해 아타리는 2억 달러 이상을 매출을 기록한다. 많은 신생 업체들이 아타리와 서드 파티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수익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많은 투자자들은 '게임 개발 = 돈'이라는 공식을 깨닫고 기술이 조금이라도 있는 회사라면 거액을 투자했으며, 여러 대형 유통회사부터 심지어 음반 회사까지 아타리와 서드 파티 계약을 체결해 게임을 선보였다. 아타리는 밀려오는 돈 러시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1981년 초, 이런 말이 돌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넣은 게임도 1백만 개는 팔릴 거야"


아타리는 밀려드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자 자제력을 상실해 버린다. 서드 파티 회사들의 게임을 모아 계약을 하는 퍼블리싱도 이때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그들이 주는 로열티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수준이나 QA 등 전권을 넘겨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회사에선 놀고 있는 인력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아타리 2600으로 어떤 게임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마구 생겨났다.


이때 서드 파티는 대혼란이었다. 이미 출시된 게임을 베낀 게임들이 범람했고, 심의가 없었기 때문에 성인 게임들이 마구 출시됐다. 동일한 게임이 게임 명만 다르게 돼 나오는 건 기본이었고, 이때 등장한 경쟁 게임기로 이식돼 문제를 확장시켰다. 콜레코비전부터 RCA 스튜디오 II, 벡트렉스, 인텔리비전,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2 등 특징과 변화 없는 게임기용으로도 몇 백 개의 게임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된 점은 성인 게임이다. 표지부터 게임 내용까지 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이어진 것. 게임 중에는 도망가는 여자를 잡아 집으로 끌고 들어가 관계를 맺는 내용부터 카우보이가 벌거벗고 있는 인디언 여성을 잡는 내용 등이었다. 이로 인해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약화됐고 일부 학교, 학부모를 중심으로 게임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가장 논란이 됐던 게임인 '커스터의 복수' <사진출처: 비디오게임베리에이션닷컴>


여기에 예상치 못한 존재도 게임 대전에 참전한다. 바로 홈 컴퓨터다. 애플 II와 오피스 시스템 경쟁에서 밀린 코모도어는 혼란이 도가니인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2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공격적인 마케팅 공세를 펼치며 홈 컴퓨터 시대를 선언한다. 당시 광고 카피 문구는 "왜 비디오 게임기를 사십니까?"였다. 광고 내에는 게임 외에도 교육 등 여러 전반으로 제품을 활용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코모도어의 마케팅이 반응을 얻자 1982년 새롭게 준비한 코모도어 64를 595달러로 출시했고 1983년에는 399달러까지 인하해 판매한다. 여기에 경쟁 기기를 가져오면 100달러를 추가 할인해주는 프로모션까지 더하며 승승장구한다. 이 제품은 단일 컴퓨터 중 가장 많이 팔린 대수 1천7백만 대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위축된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과잉되는 양상을 띄며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간다.

끔찍한 수준의 아타리 팩맨 <사진출처: 스플리터리스코어>


"그러던 중 아타리는 매우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당시에는 '발주' 기반의 유통 산업이었기 때문에  판매 수량을 체크해 제품을 생산하는 형태로 업무를 진행했다. 1981년 말 아직도 미친듯한 성장을 기록 중인 비디오 게임 시장의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각 도매상들과 관련 업체들은 내년 판매할 수량을 매우 높게 책정해 아타리에 발주를 요청한다. 그렇게 등장한 게임이 바로 팩맨이다. 팩맨은 이미 아케이드 시장 내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게임이었기 때문에 북미 내에서만 1천2백만 장 주문이 들어온다.


1982년 3월 출시된 팩맨은 출시 몇 달만에 7백만 장이 판매된다. 하지만 5백만 장이 재고로 남았고 조약 한 품질과 각종 버그로 반품 요청이 늘어나면서 논란이 된다. 당시 재정적으로 큰 위기가 닥쳤음에도 아타리 측은 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고 증권사나 언론 등에서도 말도 안 되는 성장폭을 예상하며 업체가 가져야 할 현실적인 대안이나 문제점 개선 등 위기감을 기우로 만들어버린다.


1982년 8월 후발주자로 들어온 서드파티들의 게임 판매량이 부진을 면치 못하기 시작했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던 게임들도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아타리 가정용 게임기 부분 사장을 해임한다. 이유는 내년 시장 수익 전망이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매우 낮은 수치였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뉴욕 증권 시장에 직격타를 날렸고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주가는 물론 다수의 관련 업체의 주가를 대폭락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명치에 날아간 핵주먹 '아타리 E.T'


여기에 연말 실적 향상을 위해 물량을 대거 뽑아놓은 아타리 2600 E.T 게임이 완전히 망하면서 아타리와 모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 400만 개 판매를 예상했지만 판매된 물량은 50만 개 수준이었고 이 역시도 1983년 상반기 내 많은 양이 반품되는 결과를 초례한다. 이로 인해 연간 실적은 곤두박질쳤고 특히 1982년 4분기 영업이익은 고작 120만 달러였다. 그리고 끔찍한 1983년이 시작된다.


"포문은 개발사들이었다. 수요가 빠르게 사라지자 무리하게 돈을 당겨와 쓰던 개발사가 빠르게 도산했다"


그렇게 시장된 산업의 붕괴는 도미노보다 더 빠르게 시장 전체를 몰락시켰다. 30달러 정도였던 게임은 과도한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덤핑 판매로 되돌려져 5달러 미만에 판매되기 시작했고, 이에 경쟁이 붙자 하락세를 더욱 짙어졌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제값을 주고 게임을 구매하지 않게 됐고 게임 판매는 이어졌지만 업체들은 수익은 계속 감소해갔다. 업체들은 결국 버티다 줄도산 하기 시작했다.


1983년 아타리는 한 해에만 5억 3천6백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한다. 그리고 1984년 1분기에는 2천8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2분기는 4억 2천5백만 달러의 손실을 겪게 된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그해 상반기를 끝으로 더 이상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 아케이드와 홈 컴퓨터, 비디오 전화기 사업부 등으로 나눠 분할 매각한다. 그중 아타리 게임즈는 1985년 남코(현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에 매각된다.

이런 게임들이 매달 100개 가까이 출시됐다.


그리고 1985년까지 북미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큰 폭으로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며 무너진다. 경쟁사가 없어졌음에도 소비자들은 더 이상 북미 게임을 구매하지 않게 됐고 이로 인해 게임사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유통 산업부터 카트리지를 비롯해 패키지 산업 등 다양한 분야가 영향을 받아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상황은 1985년부터 벌어지게 된다.


"1985년 10월 18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으로 불리는 기기가 북미에 출시됐다"


일본 내 1983년 출시돼 일본 내 가정용 게임기 열풍을 주도했던 일명 '패밀리 컴퓨터'(패미컴)이 텅 비어버린 북미 시장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닌텐도는 콘솔이라는 이름 대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콘솔이 가진 부작용을 최소화시켰으며, 아타리 쇼크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드웨어 락아웃 칩 반영 및 정식 라이선스 제품 인증 표식 등을 부여하며 제품, 품질 관리에 힘썼다.

북미 시장을 장악한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사진출처: 테크놀로지넷>


이 같은 닌텐도의 작전은 쓰레기 수준의 게임들에 지쳤던 게임 유저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됐다. 이후 세가의 SG- 시리즈, 마크 III와 세가 마스터 시스템,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등 품질을 고려한 일본의 우수 게임기가 북미 본토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모든 면에서 유리한 일본 제품들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던 북미의 콘솔 경쟁사들을 밀어내며 시장 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 동안 북미 내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일본 업체들 주도로 흘러갔고 마이크로소프트(MS)의 Xbox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된다.


아타리 쇼크가 벌어진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무분별한 개발 라이선스 제공

▲ 품질보다 판매에 급급한 실적 위주 산업

▲ 시장 성장을 예측하고 적절한 공급을 유도하지 못한 점

▲ 무수한 경쟁자들과 경쟁하기보단 낙관 주의에 빠져 안주했던 경영진


필자 개인적으로는 품질에 대한 안일한 생각과 노력이 이 사태를 키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아타리 쇼크는 경제적인 측면부터 시장의 원리, 경영적인 측면 등 다양한 분야에 경각심을 일으켜준 사례였다. 이로 인해 디지털 문화가 큰 하나의 방향을 잡게 됐으며, 품질이 소비자를 만든다는 철학이 크게 대두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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