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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겜노인 Nov 13. 2018

유쾌한 외계인들의 지구 침공! '스페이스 인베이더'

[세상을 움직인 게임] 타이토 스페이스 인베이더

1978년 6월 16일, 게임 개발사 타이토(TAITO)는 한 개의 아케이드 게임을 선보인다. 내부 품평회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기록했고 신작 발표회에선 투자자들의 혹평을 받은 게임이라 성공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보기 좋게 빚나갔다. 이 게임이 출시되고 나선 일본에선 100엔 동전 품귀 현상까지 벌어졌다. 바로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슈팅 게임의 전설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 때문이었다.


이 게임의 탄생 및 이야기는 다양하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개발을 맡은 니시카토 토모히로는 1969년 타이토의 자회사인 퍼시픽 공업에 입사했다. 그는 1972년 아타리사가 선보인 게임 퐁(Pong)을 보고 비디오 게임 개발에 빠져 들었고 타이토로 부서를 옮겨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나섰다. 그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만들기 전에 풋볼과 스피스, 그리고 웨스턴 건 등의 게임을 개발하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당시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흑백 색상 밖에 표현할 수 없어 잘라낸 셀로판지로 가짜 색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진출처: 게임 캡처>


니시카토 토모히로는 당시 우주전함 야마토와 스타워즈 등에 빠져 있었는데 우주 침략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게임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타리에서 나오던 무수한 게임 중 브레이크 아웃(흔히 벽돌깨기라는 불리는 장르의 게임)을 접해본 후 위에서 아래로 적이 내려오고 완전히 끝에 도달하기 전 막아내는 형태를 우주 설정과 더하게 돼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기초를 확립한다.


기획적인 준비가 끝나자 개발은 순탄했다. 침략하는 외계인 존재는 단계별로 조금씩 내려오도록 했고 대공을 방어하는 포탑 디자인이 수월하게 완성됐다. 방어 진지 개념이 있으면 좋겠다는 동료의 의견부터 UFO가 등장하면 어떻겠냐는 의견 등이 더해지자 제법 게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감 있게 경영진에게 게임을 시연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저 그랬다.


시연을 본 경영진들은 혹평했다. 게임이 너무 어렵다는 것과 여러 개의 상대가 압박하듯 유저를 조여오는 느낌이 유저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화면 가득 내려오는 적에 비해 주인공의 포탑은 1개 뿐이었고 4개의 방어 진지도 중반 정도면 너덜너덜해졌다. 니시카토 토모히로는 어떻게든 경영진을 설득했고 출시까지는 허락을 받았다.그리고 신작 발표회가 진행됐고 또 다시 혹평이 나오자 고민에 빠졌다.

미드웨이에서 선보였던 스페이스 인베이더 아케이드 기기 <사진출처: 아이콜렉션 홈페이지>


그가 의아하게 받아드린 이유는 테스트를 맡았던 젊은 사람들의 평가는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아케이드 시장 내 게임들은 부담을 주지 않는 단순한 퍼즐이나 주인공 조작 중심의 간단한 캐주얼 게임들이 대 부분이었다. 테스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게임에 몰입했고 어쩔 땐 퇴근 시간도 모르고 게임에 열중하기도 했다. 니시카토 토모히로는 이런 모습을 믿고 게임을 출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됐다. 1978년 출시된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며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 현상으로까지 확산됐다. 당시 일본 내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도심을 중심으로 '인베이더 하우스'라는 게임 센터가 마구 생기기 시작했으며, 차를 마시는 테이블 자체를 이 게임 머신으로 해놓은 찻집도 생겨났다.


성인들이 시간을 떼우기 위해 자주 들렸던 빠찡코 업체에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는 일도 벌어졌다. 오죽하면 100엔 동전이 사회적으로 품귀 현상을 일으켰을 정도다. 출시 당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가격은 40만엔 정도였으나 인기 정점을 찍을 땐 기기가 부족해 수 백만엔을 호가하기도 했고 그나마도 금방 거래가 이루어져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돼 버렸다. 언론에서는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중독성에 대해 다루기도 했고 월급을 탕진했다, 24시간 내내 했다는 등의 게임 관련 소문도 양산됐다.

당시 일본 아케이드 센터 풍경을 재현한 체험관 <사진출처: 도쿄다이렉트가이드 페이지>


당시 이 게임은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는데 미국의 경우 미드웨이가 판권을 구해 서비스를 시작했고 국내의 경우는 암암리에 무허가 오락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인기는 시대를 바꾼 명작 갤러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이후 아타리 2600 게임기와 아타리 5200, 그리고 패미컴 등을 통해 이식돼 명성을 이어나갔지만 새로움을 찾는 유저들의 성향을 반영하지 못하고 천천히 사라져갔다.


그러나 1979년 파트2 버전을 출시한 후 이 열풍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기기를 양산하며 큰 수익을 올리고 있던 타이토는 졸지에 재고가 쌓이게 됐고 경영진은 이를 처리하기 위해 재고 기기를 활용한 신작 출시를 니시카토 토모히로에게 명령한다. 새로운 기기 및 회로를 개발 중이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상부의 명령을 따르게 됐고 구형 기기를 이용한 게임 개발에 매진한다. 그러던 사이 팩맨과 갤럭시안 등의 게임이 출시돼 아케이드 센터의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고 이에 상심한 그는 퇴사를 하게 되고 1985년 리턴 오브 디 인베이더를 끝으로 더 이상의 시리즈는 나오지 않게 됐다.

갤러그의 등장은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시대의 종결을 의미한다. <사진출처: 게임 캡처>


그러나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시도는 게임 업계는 물론 유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닌텐도의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얻은 경험을 토대로 동키콩 게임을 기획했으며, 세가나 남코, 코나미 등에서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변종하거나 복제한 게임을 출시했다. 갤러그 역시 이 게임의 영향을 받았으며, 갤럭시안 시리즈 등 새로운 형태의 게임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점점 빨라지는 적들의 행보에 맞춰 대응하는 전개는 슈팅 게임 외에도 많은 게임에 영향을 줬으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 지금의 수많은 게임들의 도전 방식을 이끌어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제공한 방식이 게임 시장의 판도를 더욱 도전적이고 치열하게 만든 것이다.

가장 최신작 스페이스 인베이더 익스트림 <사진출처: 게임 캡처>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1990년 미니 베이더를 비롯해 확장형 형태의 해외판 등이 나오며 명맥을 이어갔고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전설을 이어나가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 나오게 된다. 1995년 아칸베다부터 2002년 스페이스 레이더스, 2003년 시리즈 25주년을 기념한 스페이스 인베이더 QIX, 2005년 스페이스 인베이더 DS, 포켓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30주년 기념작을 비롯해 최근에는 40주년을 기념한 스페이스 인베이더 익스트림 등이 출시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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