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인 게임] 어드벤처 명가 시에라 엔터테인먼트
가정 주부 로버타 윌리엄스는 어느 날 남편 켄 윌리엄스가 애플 II로 즐기고 있는 특이한 게임에 주목한다. 게임을 실행하면 텍스트가 나오고 사용자는 명령어를 직접 입력해 수행하는 '텍스트 어드벤처'였다. 흥미를 느낀 그녀는 남편이 자리를 비웠을 때 종종 이 게임을 즐겼는데 유저가 직접 무언가를 입력해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이 직관적이었고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녀는 특히 'Colossal Cave'(거대한 동굴) 게임에 크게 매료됐는데 당시 이 게임은 흥미진진한 모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많은 북미 유저들의 선택을 받았던 게임이었다. 몇 번의 엔딩을 거듭한 그녀는 퇴근 후 들어온 남편 켄 윌리엄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남편은 잠깐 놀랬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고 허락하게 된다. 그 날 뒤로 주부 로버타 윌리엄스는 개발자로 전향해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제작에 착수한다. 특히 그녀는 자신이 즐긴 텍스트 어드벤처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강한 형태로 방향을 잡고 진행했다. 몇 개월이 지났고 로버타 윌리엄스는 하나의 완성작을 남편에게 선보인다. 게임을 즐긴 남편은 당장 애플 II 쪽에 우편을 한 통 보냈다. 게임과 함께.
1980년 봄. 북미 게임 업계는 발칵 뒤집어진다. 새롭게 출시된 신작 어드벤처 게임 때문이었다. '미스터리 하우스'(Mystery House)로 명칭 된 이 게임은 당시 막 시작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넘어선 획기적인 시도가 포함됐다. 바로 그래픽을 제공했다는 것. 애플 II 사용자들은 물론 게임 업계 사람들도 모두 이 게임을 구매해서 즐겼다. 그리고 곧 흥미로운 주제부터 시각적인 재미까지 완벽한 이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게임 이야기는 이렇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미스터리 하우스에 모인 사람들 중 살인마가 있고 그가 모두를 살인하기 전 보물을 찾아 탈출해야 하는 내용이다. 집을 수색하고 탐색하는 내용과 그곳에 숨겨진 비밀이나 보물을 찾는 어드벤처 게임의 대표 클리세는 이 게임의 대히트로 만들어졌다. 당시 애플 II를 만든 스티브 워즈니악은 이 게임에 푹 빠져 직접 편지를 써서 윌리엄스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부부는 자신들이 설립했던 데이터 베이스 회사를 게임 회사로 전환한다. 그때 명칭은 '온라인 시스템즈'였는데 이 이름은 1982년 자신들이 사는 곳에 있던 시에라 산에서 이름을 따 '시에라 온라인'으로 개명한다. 큰 성공을 거둔 부부는 로스앤젤레스로 회사를 옮기고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회사 이전 소식을 접한 IBM 측은 윌리엄스 부부를 직접 만나기로 결정한다.
부부는 IBM의 제안에 맞춰 자신들이 준비하고 있던 어드벤처 게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그동안 부부는 자신들의 개발 실력은 물론 몇 명의 직원을 뽑아 다양한 어드벤처 게임을 개발하며 경험을 쌓고 있었다. 1982년 이후 개발에 들어간 이 시리즈는 또 한 번 윌리엄스 부부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바로 시에라를 대표하는 게임이자 모든 어드벤처 게임의 시초로 불리는 '킹스 퀘스트'(King's Quest) 시리즈다.
1984년 출시된 이 게임은 당시 1인칭 중심이었던 그래픽 어드벤처와 달리 3인칭 방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컬러 방식의 도트 그래픽을 도입해 시각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했다. 이 게임은 다벤트리 왕국의 왕 그레이엄 경과 그의 가족들이 판타지 세상에서 신비로운 일을 겪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이야기 구성과 UI 등을 시각적인 형태로 구현해 누구나 쉽게 게임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게임은 상당히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당시 그래픽을 사용한 아케이드 게임은 많았지만 PC 환경에서 사실적으로 구현된 게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킹스 퀘스트 시리즈는 보는 재미를 극대화시킨 새로운 어드벤처 게임 장르의 시작을 알렸고 많은 게임 업계가 이와 흡사한 게임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킹스 퀘스트 시리지는 이후 매년 1편씩 출시가 됐는데 1992년 출시된 6편은 어드벤처 게임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매출과 마니아층의 등장으로 탄력을 받은 시에라 온라인은 다양한 어드벤처 시리즈를 만들어낸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스페이스 퀘스트 시리즈, 래리 시리즈, 가브리엘 나이트 시리즈, 폴리스 퀘스트 시리즈 등을 쏟아내며 어드벤처 명가로써의 자존심을 드높인다. 또한 독특한 아이디어의 게임 '요절복통 기계' 같은 복합 퍼즐류 게임 등을 선보이는데 이 역시도 큰 성공을 거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0년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3D 열풍은 어드벤처 게임으로도 확산됐다. 특히 1993년 출시된 '미스트'는 업계 큰 충격을 안겼다. 실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된 그래픽과 CG 랜더링 그래픽과 음성 도입, 풀 모션 비디오 기능 등을 대거 도입해 몰입감을 극대화시켰다. 이 게임은 전 세계 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3D 어드벤처 게임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시에라 온라인 역시 이에 편승해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미스터리 추리 어드벤처 '가브리엘 나이트' 시리즈의 최신작인 '가브리엘 나이트 3: 성스러운 피, 저주받은 피'는 시리즈 최초로 3D 그래픽 방식을 도입했는데 당시 3D 기술력과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뛰어난 이야기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혹평을 받게 된다. 특히 시대에 뒤 떨어지는 그래픽과 연출, 조작이 제대로 되지 않던 인터페이스까지 여러 문제로 흥행에 실패한다.
또한 풀 모션 비디오 제작 방식의 비용 단가가 영화 수준으로 증가한 점도 문제가 됐다. 저장 매체가 CD로 격상하면서 영화 같은 연출과 배우가 직접 등장하는 어드벤처 게임들이 속속 등장했다. 하지만 선택 분기가 적고 로딩 등 여러 이슈로 인해 어드벤처 팬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인기가 금방 사그라든다. 특히 시에라에서 성인용으로 만든 '판타즈마고리아' 시리즈는 전통 어드벤처 팬들의 외면을 사는 계기를 사게 된다.
이 게임은 3D풍 그래픽과 모든 이벤트 영상을 풀 모션 비디오 방식으로 제공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기가 적고 퍼즐 위주와 자극적인 데드 신, 그리고 성적 묘사 위주의 표현으로 논란이 된다. 논란은 화제가 되며 이 게임의 판매량은 증가했으나 전통적인 팬층은 혹평을 쏟아낸다. 시에라는 1편의 화제가 2편에서도 이어지길 바랬고 더욱 자극적인 소재(동성애, 근친살해, 인체 개조)를 넣었지만 더욱 혹평만 듣고 시리즈를 접는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겪으로 미스트 시리즈 큰 성공은 3D 기반의 퍼즐류 어드벤처 게임이 대량으로 쏟아지게 된다. 그중에는 '일곱 번째 손님'(The 7th Guest) 같이 200만 장 이상을 판매하고 게임 내에서 호평받은 명작도 존재했지만 대 부분은 단순 퍼즐을 해결하고 풀 모션 비디오를 보는 형태들이 양산돼 어드벤처 팬들의 외면을 산다. 당대 어드벤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 시에라 온라인과 루카스아츠는 결국 1990년대 후반을 끝으로 어드벤처 게임이 아닌 타 장르로 회사의 노선을 변경한다.
1998년 윌리엄스 부부는 퇴사하게 된다. 남아있는 경영진은 시에라의 분위기 개선, 변경을 위해 힘이 빠진 어드벤처 부분의 인력들을 대거 정리해 버린다. 기존 인기 시리즈였던 레리 시리즈부터 주옥같은 명작들의 원작자가 사라지며 명맥 역시 끊어져 버린다. 이후 2002년에는 회사의 사명을 현재 이름인 시에라 엔터테인먼트로 바꾸고 게임 유통 등에 참여한다.
이후 비벤디에 자회사로 편입되며 사실상 시에라의 명성이 끝이 난다. 이후 '피어'(F.EA.R) 시리즈를 비롯해 래리 시리즈 최신작 등을 선보이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액티비전 블리자드 시대가 열리자 산하 스튜디오로 흡수되며 2008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