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다방 문 앞에서
의성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다. KTX나 고속버스가 직통으로 척척 데려다주면 좋겠지만 경북 내륙 깊은 곳에 있는 의성은 주변의 대도시인 대구, 안동, 구미를 거쳐서 가거나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청량리발 무궁화호를 타야 한다. 제 아무리 인근 대도시로 가는 KTX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차역에서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을 법한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것보다 무궁화호를 타는 게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길에서 시간 버리기'가 여행의 주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당일치기 여행에서는 시간을 버리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무궁화호를 타는 일은 적당한 소음과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례함과 무심함을 정겨움으로 포장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청량리역을 출발해 한참을 달리는 기차는 영주역에서 무려 6분이나 정차한다고 한다. 전기기관차를 디젤기관차로 바꾸기 위해서라는데 아직 전철 선로가 완성되지 않은 구간이 나라의 동남쪽 구석에는 있나 보다. 디젤기관차라고 해서 특별히 승차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터널로 들어서니 우렁찬 엔진소리가 터널벽을 뚫을 기세로 사방을 때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성가신 소리는 핸드폰 벨소리였다. 왜 무궁화호만 타면 간간이 도롯또(트로트보다는 이 표현이 더 어울린다.)가 그것도 큰소리로 울리는 것인가. 더구나 나도 듣는 소리를 핸드폰의 주인장은 못 듣는지 일부러 즐기느라 그랬는지 후렴구가 끝나 갈 때 즈음에야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내서 커버를 연 다음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여보세요'를 사자후처럼 토해낸다. 이곳은 가요무대인지 미스터트롯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나이 듦에 따른 촉각과 청각의 쇠퇴 정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궁금해하다가 나이는 누구나 들게 마련이고 감각이 무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좋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애써 음악을 듣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차는 풍경을 가르며 앞으로 앞으로 달린다. 차창 밖의 풍경은 아직 완전한 봄이 아니지만 또한 봄이 아닌 것은 아니어서 강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 여린 잎은 꽃처럼 화사했다.
의성역 다음인 다음인 탑리역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다. 내린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두 명이었다. 역사가 있긴 했지만 간이역을 겨우 면한 정도였다. 역전의 분주함, 설렘 이런 건 하나도 없고 그저 쓸쓸했다.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이래 저래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얼른 지도 어플을 열고 현재 위치에서 카페모양의 아이콘을 눌렀다. 면 소재지 작은 마을에 찻잔 모양의 아이콘 여러 개가 촘촘하게 두둥실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에 확대를 해서 보니 대부분 다실, 휴게실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다방들이었다. 아마도 면 소재지 상업시설 중에서 단일 업종으로는 가장 많은 업소(장사를 하는 모든 곳을 업소라 부를 수 있지만 이럴 땐 업소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가 있을 것이다. 금성면의 중심인 탑리리에는 최근에 새로 생긴 카페(다방 말고)가 두 군데 있긴 하지만 이렇게 다방들이 나를 반겨주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다방의 고장에 왔으면 다방에 가야지. 카페는 서울에도 많잖아.
몇 군데를 물색하다가 탑리 아니 탑리리(가 맞는 평칭이다.)의 상징 탑리리 오층석탑 입구에 있는 이름도 정겨운 은하수다방의 문을 열고 설렘보다 큰 두려움을 안고 들어갔다. 국민학교 다닐 때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찾으러 면사무소 앞 동네 다방을 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실제 경험 때문인지 티비에서 많이 봐서 그랬는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의 다방에는 값이 많이 올라 한 장에 8백 몇십 원 한다는 연탄을 때는 보일러가 가운데에 있고 와인색 레자 소파와 탁자는 시그니쳐라고 해야 할지 클리셰라고 해야 할지 모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전화만 오면 바로 달려 나갈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기 위해 배달 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스뎅(스테인리스) 오봉(쟁반) 위에 빨간색 맥심 마호병(보온병)과 하얀 커피잔배달이 올라가고 그 보자기 사방 모서리로 두 번 묶은 오래전 기억 속 배달키트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오도바이(오토바이인줄 알지만 이렇게 쓰고 싶었다.)는 모닝으로 진작에 바뀌었다고 한다. 성수기(여름에 그렇게 배달을 많이 시킨다고 한다.)에는 기름값만 일주일에 몇 만 원 나오지만 장사가 잘 된단다.
커피(3천 원으로 제일 싸다), 율무, 칡차, 산수유, 우유, 동의한차, 감식초, 들깨차, 냉요구르트, 쌍화차(6천 원으로 제일 비싸다.) 등등 마실 거라면 없는 게 없을 것 같은 혼돈의 메뉴판에서 내가 고른 건 바로 다방의 시그니쳐 다방 커피였다. 다방이라 다방 커피를 주문했는데 요새는 촌에 아부지들도 벌랙(블랙) 커피를 마신다며 촌에서 왔냐고 묻는다. 나보다 누나임이 확실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아가씨라 부르는 마담에게 벌랙 커피는 서울에서 마시겠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커피)둘(프림)둘(설탕)둘이 환상적인 조합인 다방커피를 한 잔 했다. 다른 손님이 없어서 내 앞에 슬쩍 앉더니 자기도 한 잔 마시겠다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텀블러에 이미 만들어 둔 자기 커피를 마셨다. 좀 있다 배달 나갔다 돌아온 누님 아가씨도 앉더니 자기도 한 잔 마셔도 되냐길래 슬며시 매출 말고 매상을 올리는 걸 뭐라 할 수 없어 그러라고 했다. 다시 갈 일이 거의 없을 같은 다방에 앉아 레지라고 부르기엔 순박한 누님들과 기름값 오른 이야기며, 촌동네 이야기며, 비싼 카메라 이야기며 시시껄렁한 농을 건전하게 주고받으며 잠시 소일했다. 촌동네 인싸 오라버니들의 아지트인 은하수다방에 능글능글한 표정의 어르신 한 분이 들어오길래 이제는 내 갈 길을 가야겠다 싶어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