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의 정기를 받은 마을
탑리리는 금성면의 면소재지이다. 그러고 보니 소재지라는 말이 정겹고도 낯설다. 여러 행정단위 가운데서도 면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아무래도 동소재지, 구소재지, 시소재지, 이런 말은 잘 와닿지 않는다. 면단위 시골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용어이다. 금성면이 그 이름을 땄을 금성산은 해발 531미터의 화산이다. 공룡발자국도 발견된 곳이다. 제주도로 치자면 조금 높은 오름 정도의 크기인데도 이 산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들을 보면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산운마을은 탑리리와 맞닿아 있다.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대감마을로도 불린다고 한다. 대감들이 살던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잘 보존되어서 400여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곳이다. 탑리리에서는 걸어서 갈 만한 곳이다. 그렇다고 인도가 잘 조성되어 있지는 않다. 관광지가 아닌 이상 지방도로에까지 보도블럭이나 펜스를 칠 곳은 없다. 이런 길을 걸을 때 항상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왼쪽으로 가야할지. 차는 우측통행, 사람은 좌측통행이었는데 우파 정권에서 그마저도 우측으로 바꾸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더라만 좌든 우든 안전이 먼저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측길로 걷다가는 등 뒤로 오는 차를 매번 의식해야 하고 대처도 늦을 것이므로 내 앞으로 달려드는 차를 항상 주시할 수 있는 좌측길로 걷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된다는 말은 이런 것까지 살피기 때문이리라.
40분쯤 걸어서 산운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금성산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이 마을 사람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었다. 저멀리 기세등등한 기와지붕들이 펼쳐져 있고 학록정사가 금성산을 병풍삼아 단단하게 앉아 있었다.
“학록정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정사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을 말한다. 학록정사는 학동 이광준의 공을 기리고 후배를 기르기 위해 영조 26년(1750년)에 지은 건물로 추정된다.이광준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선조 38년(1603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지붕 옆모습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로, 표암 강세황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학록정사는 산운마을의 뒤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흙과 돌로 만든 담장으로 둘러쳐진 정면에 소시문이란 이름을 붙인 대문채가 있다. 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학록정사’라는 액자가 걸려 있는 강당이 있고, 앞의 왼쪽에 관리사가, 오른쪽에는 헛간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답게 정갈하게 잘 보존된 학록정사에는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강당으로 쓰였다는 정사의 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뜻을 세운 사람을 기리며 그 뜻을 잇고 그렇게 이어진 뜻이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400년 뒤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산운마을로 들어섰다. 산자락 구릉 평평한 곳에 고택들의 지붕 처마선이 어깨를 맞댄듯 자리잡고 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어 그저 평화롭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소우당으로 발을 들였다가 볼 것 없으니 나가라는 주인장의 꾸지람(!)을 들었다. 문화재라도 주민이 직접 거주하는 곳이면 당연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맞지. 숙박체험도 전통결혼식도 가능한 곳이라고 하던데 제대로 구경은 하지 못하고 이름난 정원만 슬쩍 둘러보고 발길을 돌렸다. 대대로 물려받은 고택이 문화재라면,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자부심도 있겠지만 나같은 객들이 때때로 성가시기도 하겠지. 산책 삼아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폐교를 공원으로 조성한 산운생태공원이 있다. 학교 건물은 전시관으로 고치고 학교 주변을 공룡과 생태를 테마로 만든 곳이다. 어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생태라는 이름은 좀 무색한 편이다. 공원의 경계 안에 없어도 주변이 온통 생태공원 매한가지라 그럴 것이다. 산운마을은 차를 타고 주변을 지난다면 한 번 슬쩍 들러서 산책할 정도는 될 만한 곳이다.
짧은 당일치기 여행을 할 때 같은 다시 되짚어 가는 것만큼 아까운 것이 없다. 그것도 걸어서 가야 한다면. 탑리역에 내리자마자 다방에서 노닥거린 시간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탑리역-산운마을-탑리리오층석탑-조문국박물관-대리리고분군-의성읍-고운사로 이어지는 일정이 하루 안에 물흐르릇 소화되려면 드문드문 있는 버스 시간을 잘 맞춰야 된다. 하지만 다방에서 틀어진 시간을 바로잡기에는 시골버스의 시간표에는 빈틈이 너무 많았고 도리없이 택시를 불렀다.(택시 타는 건 이게 마지막일줄 알았다만) 탑리리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층석탑 입구에서 내렸다. 사실 이 탑은 20여년 전에 본 적이 있다. 한 때 몇 년간 문화재 답사에 빠졌다가 석탑을 보러 전국을 다닌 적이 있다. 이름나거나 역사적의 의미 있는 탑이 있는 곳이라면 절, 절터, 산속, 강변을 가리지 않았다.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 가장 많이 눈에 익은 양식인데 반해 안동, 의성 지방에는 3층도 아니고 석탑이 아닌 전탑과 목탑의 양식을 따르는 탑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탑이 국보 77호인 탑리리오층석탑이다. (탑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따로 해보기로 하고…) 이 탑 하나를 보려고 이 동네까지 20여년 전에 의성땅을 밟았다. 다시 만나니 오랜 친구를 본듯 반갑더라. 다시 왔냐고 상냥하게 인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국보이긴 하지만 삼엄한 경계가 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동네 언덕에 편안한 이웃처럼 잘 자리잡고 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원 내부에 자전거, 경운기, 리어커의 출입을 금하지는 않고 제한한다고 하니 자기 집 앞마당인줄 알고 경운기 머리를 들이민 누군가가 있었나 보다. 아마도 절터였을 그곳엔 탑 말고는 다른 유구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외로웠고 지금도 외롭지만 마을 가운데서 쓸쓸하지만은 않은 오층석탑에게 또 20년 뒤에 만나게 될까 하며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