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알기 아까운 데
산운마을도 보고 탑리리 오층석탑을 봤어도 아직 금성면에는 볼 것이 남아 있다. 군의 면 단위 치고는 정말 볼거리가 많은 곳이 아닐 수 없다. 무궁화호가 서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다음 행선지는 조문국박물관과 바로 옆에 있는 대리리고분군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이 대리리, 탑리리로 리가 두 번이나 반복된다. 혹시나 오타인가, 설마 한자는 다르겠지 싶어 한자를 찾아보았더니 두 글자 모두 마을 리자였다. 대리면 대리고 탑리면 탑리일 텐데 굳이 같은 한자를 두 번이나 쓴 이유가 궁금했지만 답을 구하진 못했다. 이래저래 좀 재미난 곳이다 금성면은. 오층석탑 앞에서 조문국박물관까지 지도를 검색해 보면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킬로미터. 하루에 여섯 번 있는 230번 버스를 타면 20분, 자동차로는 6분, 걸어서는 50분이 걸린다. 일단 나는 차가 없으므로 걷거나 버스를 타야 하는데 시골 버스가 날 기다려 줄 리가 없다. 시골 버스를 타자면 거의 비행기 타는 정도의 사전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걷는 걸 선택했다.
나도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지금의 시골버스를 보고 있으면 뭔가 아슬아슬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최소한 한 시간에 한 대씩은 있었을 그 버스가 지금은 하루에 서너 번 다니고 또 몇 년 뒤에는 하루에 한 대, 그러다가 노선폐쇄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그 추세는 여태 바뀐 적이 없다. 서울, 수도권으로 몰렸고 여전히 몰리고 있는 인구가 버스 노선을 부활시킬 만큼의 규모로 지방으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돌아온다 한들 그들은 자기 차를 타지 시골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므로 시골버스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해서 틀린 말이 아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미 택시비를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버스의 소멸에 대응하고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시골 어르신들의 이동권이라는 끈은 가늘어지고 있지만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중교통의 소중함을 느끼며 시골길을 다시 걷는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다기보다 일방적으로 차도인 길을 걷는다. 시속 4킬로미터의 속도로 보는 풍경은 느리지만 세밀하다. 생각은 없어지고 다리가 아픈 것도 잊는다. 목적지만 생각하고 걷는다. 그런 게 있을 것 같지 않은 시골 마을에 박물관 건물이 눈앞에 드러난다. 의성조문국박물관이다.
박물관 소개글에 따르면 조문국(召文國)은 고대 의성지역에 있었던 초기국가 형태(읍락국가)의 나라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정확한 멸망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서기 185년까지는 존재하였고 의성금성산고분군이 위치한 금성면 일대가 조문국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 발굴이 이루어져 조우형금동관, 금동관모, 은제관장식, 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조문국의 후예들이 5~6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조문국이라. 삼국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작은 나라지만 역사시간에는 배운 기억이 없을 정도로 생소한 나라이다. 글로 남겨진 기록은 많지 않지만 유물이 조문국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데 조문국박물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경주나 부여, 공주 같은 주요 도시에 있는 국립박물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작은 지역에 있는 박물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문국박물관은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유물은 없지만 그 대신 조문국의 터전인 이 지역의 유물들이 발굴된 과정과 역사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지하수장고를 개방형태로 만들어서 온전한 형태의 토기들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의성군 금성면 출신인 박찬 변호사가 기증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유리로 된 쇼케이스 안에서 수백수천의 세월을 건너뛰어 온 유물들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장고 가운데에는 책상 하나가 놓여 있는데 바로 학예사의 책상이었다. 책상 위에는 유물 모형과 각종 필기구, 계측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박물관에서 일을 하는 학예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유리로 만든 개방형 지하수장고 그리고 학예사의 책상, 이 세련된 기획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일부러 찾아올 정도는 아니겠지만 의성까지 왔다면 한 번은 들러볼 만한 박물관이다. 게다가 무료다.
작은 개천을 하나 건너면 바로 대리리고분군이다. 차를 가지고 왔다면 고분군 주차장으로 따로 이동하는 편이 낫다. 걸으면 금방이라 바로 닿았다. 조문국경덕왕릉을 중심으로 40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완만한 곡선의 향연이 아름답다. 느린 선율이 연주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가 묻힌 무덤은 평화롭다. 무덤 사이를 산 자들은 미끄러지듯 걷는다. 누워있는 죽은 자의 공간에서 서 있는 산 자는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본다. 발굴된 고분 속을 들여다보며 고분군의 역사적 의의에 굳이 큰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 무섭지 않은 무덤의 공간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리리고분군을 감상하는 방법은 각자의 몫이니.
이번에는 드디어 시간을 제 때 맞춰 의성읍내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