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요리생활
이맘때라는 말은 어감도 좋지만 아련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늦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든 이맘때엔 항상 바알갛고 말캉한데 부드럽고 달디 단 감을 원 없이 즐겨 먹는다. 경남 밀양에서 취미로(라고 하기엔 규모가 제법 크지만 본격 농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게) 감농사를 짓는 장모님이 이맘때 항상 감을 한 박스 가득 일주일이 멀다 하고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반시 하면 경북 청도, 곶감은 경북 상주가 이름을 날리지만 나는 경남 밀양의 김태순표 감을 최고로 친다.
밀양에서 우리집까지 삼백 몇십 킬로미터를 달려온 상동반시 상자 위에는 개봉 날짜가 적혀 있다. 받은 날로부터 대략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 얼른 열어보고 싶어 조바심이 나지만 견뎌내야만 한다. 참지 못하고 열었다가는 딱딱하고 떫어서 먹지 못하는 감을 마주하게 될 것이므로. 그 사이에 감은 상자 안에서 후숙이 되는데, 저 혼자 스스로 되기도 하지만 상자 안에 넣어 둔 연화제(에틸렌)의 도움을 받는다. 감나무에 달린 채로 말랑말랑하게 익은 것이 제일 좋겠지만, 유통과 판매의 관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을지언정 그 맛이 어디 멀리 달아나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봉일이 되어 박스에 단단하게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어 내고 상자를 열면 품새가 반듯한 주황색의 감들이 단정하게 윤기를 뽐내며 좌우앞뒤 줄을 맞추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이때가 되었다고 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두어날 정도 실온에 두어야 한다. 하루하루 감의 외모가 바뀌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데 불투명했던 표면이 투명해지고 손으로 눌렀을 때 약간의 저항감을 느낄 정도로 말랑할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꼭지에 감 과육이 붙어 떨어져 나갈세라 꼭지를 조심스레 떼어내고 감을 반으로 쪼갠다. 씨하나 없이 투명한 속살이 드러나는데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서 얼른 입으로 가져간다. 껍질만 남기고 쏙 발라 먹으면 입안으로 퍼지는 물기와 단맛, 과육의 부드러움과 씨가 되다만 부분의 쫄깃함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찰나의 행복이 이런 건가 싶는 순간이다.
우리집에서는 이 감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찰나의 행복을 독점한다. 감은 한 번 익으면 오래 보관하기 힘들어서 빨리 먹어야 한다. 독점할뿐더러 많이 먹기도 한다. 가을엔 말이 살을 찌우지만 이맘때 나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찐다. 달디 단 감을 마음껏 먹은 대가를 치르는 중이지만, 또 밀양에서 장모님이 보내주신 감이 창가에서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굽은 등을 한 늙은 장모님이 주름진 거친 손으로 감나무에 매달려 감을 따고 하나씩 상자에 담고 포장해서 서울 사는 딸네집 보내는 장면이 겹쳐지며 이맘때 원 없이 감을 즐길 수 있는 해가 또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둘 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깥 날이 추워서 우리집 감의 색채가 더 또렷해 보이는 오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들을 하나씩 다시 되돌아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