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쉽지만...
[이 글은 2016년말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다녀온 오로라 여행을 32편으로 기록한 글의 일부입니다.]
공지글을 조회한 사람이 수천이었다. 그만큼 극적인 사연을 가진 사람도 많을 터였다. 나처럼 무난무난하게 산 사람의 사연이 오로라와 어울릴 리 없었다. 기대를 접고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최종 불합격이라는 발표가 나면 아내에게 지원서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발표를 한 주 정도 앞둔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보조작가였다. 내가 쓴 사연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오로라 보러 가게 되면 시간을 낼 수 있냐, 혼자 갈 수 있냐 등에 대한 답을 성의껏 했다. 너무 목매는 것 티내고 싶지 않아서 쿨한 척 하며 경쟁률이니 합격 가능성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프리랜서로 하는 PD 친구와 방송 작가일을 하는 후배에게 이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확률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그때그때 다르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건 우리 딸도 할 수 있는 답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답이기도 했다. 며칠 뒤 방송을 제작할 피디와 작가가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이쯤되면 거의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그들과는 대화는 즐거웠다. 굳이 오로라와 내 인생과의 상관계수를 높게 보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송에 출연하지 않아도 계속 알고 지내고 싶은 분들이었다. ‘혼자 가게 되면 출연이 어려우실까요?’, ‘꼭 이 방송이 아니라도 다시 뵙고 싶네요.’라는 그들의 말은 불합격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들렸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날을 받아놓고 발표를 기다렸던 건 인사이동, 승진뿐이었다. 또는 아이를 가졌을 때 ‘아들이에요, 딸이에요?’를 넌지시 암시적으로 묻고 기다리던 것 말고는 가슴을 졸이는 발표가 있었나 싶다. 발표일은 일주일 뒤로 미루어졌다.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제작진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도 많고 사연이 있는 사람이 많아서 아마 나는 안 될거야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철딱서니 없이 솟아오르곤 했다. 최종 발표일, 그날은 아내와 내가 사귄지 22년이 되는 날이었다. 예상대로 불합격. 그러면 그렇지. 합격하신 분들 즐겁게 오로라 보고 오시길 바랍니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하고 깜짝 놀랄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잘 안 되었다고, 하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의 러브스토리를 글로 정리했으니 읽어봐 달라고 했다.
‘선정되지 못한 것은 잘 된 일이다. 다큐멘터리 출연이라니 나의 초상권을 존중해 달라, 방송 출연하는 거 몇 번 해봐서 알지 않느냐, 나는 선정되었어도 못간다, 갈 거면 혼자서 가라, 우리의 러브스토리는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보마.’
아내의 반응이었다. 좋아할 줄 알았더니 차라리 안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니 너답다.
다음날, 피디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장시간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선정하지 못해서 아쉽다. 출연자의 균형을 맞추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는 정중한 메시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음을 써 주시니 오히려 내가 감사했다. 내가 뭐라고.
그리고 그날 오후 늦은 시각, K작가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작가님에게도 아쉽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다는 메시지를 보내둔 터라 그에 대한 답인 줄 알았다.
“여행 준비 안 하고 뭐하세요?”
듣고 있는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선정도 되지 않았는데.”
“한 분이 사정이 생겨서 못 가시게 되었고 박선생님이 출연자로 추가 선정되었습니다.”
세상에,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진짜요. 지금 거짓말 하시는거죠? 그럴리가요.”
“아녜요. 제작진 회의 결과 박선생님의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살면서 통보라는 것을 받는 순간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대체로 통보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둘 중에 하나다. 들었을 때 감정의 큰 변화가 없는 것은 통보 축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정보의 영역에 해당할 것이다.
나를 기쁘게 했던 통보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고등학교 합격, 대학교 합격, 그래 우리 사귀자, 우리 다시 만나자, 입사 합격, 응, 결혼해, 승진 발표, MBA 대상자 선정, 축하합니다 딸입니다.
슬펐던 통보도 있었다.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다.), 귀하를 인재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 조직검사 결과 암입니다,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사망하셨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통보가 이틀 사이에 두 번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실망의 정도가 크지 않은 통보 뒤에 따라온 통보는 추가 선정이라는 깜짝 놀랄만한 기쁨의 통보였다. 좋은 소식을 전해준 작가님을 얼싸안고 싶었지만 전화기 속이라는 것 말고는 그녀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기쁨은 기쁨대로. 하지만 선정이 되더라도 안 가겠다고 버티던 아내를 설득할 일이 남아 있었다.
선정되신 분 가운데 어떤 분에게 사정이 생겨서 기회가 나한테 돌아왔는지를 나중에 오로라를 보러 가서 제작진에게 듣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매우 안타깝고 슬픈 내용이어서 내가 선정된 사실에 마냥 기뻐할 수만 없었다. 그분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에 오로라 여행의 경험을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오로라 여행을 글로 남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