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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Aug 02. 2022

오이냉면 한 사발로 여름을 난다


동네 친구가 처가에서 받아왔다며 노각 몇 개를 전해줬다. 몸집을 단단히 키운 오이는 호박인지 오이인지 모를 만큼 통통했고 비닐팩 안에서 서로 자리를 차지하느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지퍼백을 열자마자  산뜻한 오이향이 훅 올라왔다. 오이의 몸에 가득 담긴 경북 구미의 여름 냄새가 서울로 왔다. 친구네 장인, 장모님의 마음도 함께. 



어른들 마음은 다 비슷하다. 시골 어른들이 보내주는 재료들은 언제든 동네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택배비가 더 들 수도 있는데 기어이 박스 안을 테트리스 하듯 끼워 맞춰서 알뜰살뜰하게 챙겨서 보낸다. 푸른 호박이 중심을 잡고, 신문지로 돌돌 말린 오이와 가지도 한 자리 차지한다. 만원 버스 승객처럼 이리저리 엉키게 비닐봉지에 꼭꼭 눌러 담은 풋고추의 녹색은 짙다. 소주병에 담아 입구를 비닐로 이중삼중으로 씌워 노란 고무줄로 꽁꽁 동여 맨 참기름이 빠질 수 없고 그 많은 재료들 사이사이는 고춧가루와 참깨가 완충재 역할을 하며 빈틈을 채운다. 자두나 복숭아 한두 알도 덤으로 있을지 모른다. 줄기의 억센 부분이 다 손질된 제철 호박잎은 뚜껑 역할을 한다. 그런 택배 상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시골에 사는 부모님이 있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보물상자가 집으로 도착하는 날, 상자 속을 빈틈 하나 없이 채울 만큼 빈틈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기도 전에 철없는 자식들은 이 많은 식재료를 어떻게 처리할지부터 고민한다. 언젠가 그 보물상자를 받지 못할 그날이 오면 그렇게 사무치게 그리워할 거면서. 



아마도 다른 여러 가지 여름 채소나 과일과 함께 보물상자에 실려왔다가 우리집까지 오게 된 그 귀한 노각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반은 속을 무침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오이냉국을 할까 했다. 오이냉국이야 말로 여름 채소 오이를 가장 여름 채소답게 먹는 방법이니까. 냉장고에 두지 않았으나 차가운 느낌이 절로 나는 오이는 껍질을 듬성듬성 손질한다. 어섯썰기는 최대한 길게 한다. 그래야 건져 먹기 쉬우니까. 썰어 놓은 오이는 반쯤 겹치게 늘여서 편 다음 잘게 채썬다. 통통 통통통통 통 통통통. 나무 도마 위에서 오이 써는 소리는 유달리 경쾌하다. 차가운 재료라 그런지 소리에도 청량함이 있다. 조선간장으로 조물조물 밑간을 한다. 참기름을 조금 써도 되는데 너무 많이 쓰면 참기름이 차가운 물에 굳어서 둥둥 뜬다. 청양고추가 있으면 쫑쫑 썰어 넣어 밋밋한 맛에 알싸한 상큼함을 더한다. 물과 식초, 얼음을 넣고 통깨를 조금 뿌려서 시원하게 먹으면 된다. 할머니는 여기에다 미원을 넣기도 하셨다. 우리 모두 조금 솔직해져 보면...할머니 손맛의 비밀은 사실 그거 아니더냐. 시골서 여름에 딱히 에어컨도 없던 그 시절에 모두가 더위에 지칠 땐, 우뭇가사리 콩국과 함께 오이냉국이 부엌일을 하는 사람도 손쉽고 먹는 사람도 더위를 쉬이 식힐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럴 생각으로 오이를 지켜보다가, 노각은 아무래도 육질이 단단하고 굵어서 조금 다르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센 껍질을 다 벗겨 내고 씨가 단단한 속을 다 파낸 뒤에 국수처럼 길게  썰었다. 소금을 훌훌 쳐서 30분 정도 재어 두었다가 물기를 꼭 짜냈더니 아삭하되 쫀득한(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면발이 되었다. 오이냉국처럼 만들까 하다가 손맛의 대가(!) 할머니도 미원을 쓰셨는데 나도 쉬운 길을 가보자 싶어 일전에 사둔 냉면육수를 그대로 들이부었다.(참고로 나는 미원 애호가이다.) 식초도 몇 방울 더했다. 아주 훌륭한 오이냉면이 되었다. 안 만들어 먹었으면 후회할 뻔할 정도로 맛있었다. 딱 이 시절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맛을 떠나 그 자체로도 충분히 특별하다. 그 계절의 온도와 습도, 비, 바람을 온전히 품은  노각은 자연이 키워 냈고, 어르신들의 애틋한 마음 덕에 우리집까지 와서 훌륭한 계절 음식이 되어 주었다. 덥다 덥다 짜증만 냈는데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니 감사할 일이 더 많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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