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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Feb 19. 2022

생일 선물은 꽃 대신 샐러드야

아내의 생일이었다. 누군가챙기기보다 챙겨줘야 하는 일이 많은 중년의 생일은 애매하다. 어린 아이라면 부모가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나이가 많이 든 부모가 되면 성인이 된 자녀들이 생일 잔치를 해준다. 그러니 아래로는 자식을, 위로는 부모를 신경써야 하는 사십대에게 생일은 그냥 보통날보다 조금 다른 하루일 뿐이다. 그래서 아내도 나도 우리들의 생일에 대해서는 큰 기대가 없다. 어, 오늘이 생일이네 하고 지나간다.

아내의 생일의 이해당사자가 된 지 벌써 27년째다. 연애 초기에는 거의 아내한테 미쳐 살았으므로 단언컨대 남부럽지 않은 생일 이벤트를 했었다. 그 정점은 아내가 캐나다 밴쿠버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였다.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고 생일에 맞춰 휴가를 나갔어도 비행기를 타지 않은 이상 생일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해줄 수 없었다. 돈 없고 시간 많은 군인이 할 수 있는 건 편지 쓰는 것 뿐. 국제우편이 가는 시간을 고려해서 아내의 생일 2주 전에 편지를 썼다. 아내가 머물고 있는 하숙집 주소를 적고 그 밑엔 아내의 이름 대신 주인 부부의 이름을 썼다. 봉투 안에는 10달러(이것도 구하기 어려워서 스튜어디스 누나를 둔 후임이 외박 나갈 때 부탁했다.)와 부부에게 쓴 편지를 넣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나는 당신네 집에 살고 있는 여학생의 남자친구다. 그녀의 생일이 곧 다가오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여기 10달러를 넣어서 보내니 이 돈으로 꽃을 조금 사서 그녀 방앞에 놓아두면 참으로 고맙겠다. 그 편지는 잘 전달되었고, 내 사연에 감동(!)했을 그분들이 꽃을 사서 그녀 방앞에 두면서 편지도 10달러도 함께 꽂아두었다고 한다. 그 편지 지금도 우리집에 보관되어 있다. (낯 뜨거워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그런 이벤트까지 서슴지 않던 20대를 지나 40대가 되면서 아내의 생일에는 꽃 한 바구니를 주문한다. 마침 지인 중에 흘륭한 플로리스트가 있어서 아내가 딱 좋아하게 꽃을 만들어 준다. 올해도 다른 건 할 만한 게 없고 꽃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등학생 큰 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엄마와 늘 투닥거리지만 그래도 의리하나만큼은 최고인 큰 딸이다. 엄마 생일선물로 이게 어떻겠냐고 사진으로 보내온 건 비누로 만든 보라색 장미꽃다발이었다. 그래 올해는 니가 엄마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려무나. 대신 생일파티 전까진 비밀로 하자고 했다. 나는 소소하게 책을 좋아하는 아내의 이니셜을 새긴 가죽 책갈피를 주문했다. 본인 스스로 특별한 선물은 하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저렴한 선물이라도 그리 섭섭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이 돼서 케익에 촛불을 꽂고 생일축하 노래를 다같이 불렀다. 생일선물을 전달했고 아내는 왜 올해는 꽃이 없냐고 농담처럼 약간의 섭섭함을 표시했다. 아... 꽃다발을 주문했어야 되나. "올해는 꽃을 주문 안 한 이유가 있어." 잠시 후 큰 딸이 숨겨두었던 비누 장미꽃다발을 받고서야 아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꽃다발을 주문할까 하다가 얘가 꽃을 한다길래 일부러 안 했어. 딸의 선물이 더 빛나는 게 좋지 않겠어." 어쨌든 올해도 선방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으르렁거리던 모녀 사이에도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꽃을 못 받아서 섭섭하다니, 그럼 꽃 대신 꽃처럼 예쁜 샐러드를 생일선물로 만들어줄께. 기다려보셔."

재료는 토마토, 배추, 피망, 양파, 올리브오일, 소금, 통깨, 후추, 식초.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토마토는 작은 크기로 깍둑썰기를 한다. 배추는 결의 직각 방향으로 잘게 썰어준다. 피망은 반으로 갈라 씨를 버리고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네모로 썬다. 양파는 얇게 슬라이스 해서 찬물에 담갔다가 건진다. 이 모든 재료를 믹싱볼에 넣는다. 그런 다음 올리브오일 듬뿍, 소금 반 찻술, 식초 한 찻술, 후추 약간, 절구에 간 통깨 한 큰술을 넣는다. 숟가락 두 개로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뒤집어 주면서 잘 섞는다. 그라나 파다노 치즈나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가 있으면 갈아서 올린다. 발사믹 식초는 안 넣어도 된다. 올리브오일과 소금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 게다가 고소한 통깨까지 갈아 넣었으니.


예쁜 접시에 올렸더니 꽃이 피었다. 미역국도 아닌 샐러드가 생일선물이라니 이상할 법도 하지만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좋았으니 그만한 생일선물도 없겠다. 따뜻한 음력 1월 16일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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